출처 : 에큐메니안
“공동소유, ‘재산은 하나님의 것’고백만 있으면 힘들지 않아” | ||||||||||||||||||||||||||||||||||||
문동환 박사 아름다운마을 공동체 방문 최철호 목사와 대화 나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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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박사는 지금 공동체 탐방 중이다. 5월 초 충북 보은에 있는 보나콤(보은예수마을)에 이어 5월 17일(목) 오전 10시 강북구 인수동 국립재활원 뒤편에 위치한 아름다운마을공동체에 방문했다.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마을밥상, 공동체생활영성수련원, 생명평화연대, 기독청년아카데미, 공동체지도력훈련원, 공동체희망연대, 농생활연구소, 농생활소농연대, 생태건축모임 등 육아와 교육, 생활, 영성훈련, 농업에 관한 다양한 사역공동체를 통해 일상생활과 역사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일관성 있게 고백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하는 아름다운마을공동체 최철호 목사와 대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는 문동환 박사와 함께 부인 문혜림(페이 문, 본명 : 헤리엇 페이 핀치벡)사모와 생명평화마당 총무인 김희헌 목사가 함께 방문했고 아름다운마을 공동체 최철호 목사를 비롯해 젊은 공동체 성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문동환 : 공동체가 수유리로 들어오게 된 배경과 과정을 이야기 해 달라. 최철호 : 공동체 시작 당시가 1991년이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결혼,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같이 모여 살아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수유리로 모이게 됐다. 나름의 지역선택 기준을 정했는데 ‘청년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지역, 지역시민사회운동이 활발하지 않은 지역, 도시에서 생태적 삶이 가능한 지역’이라는 기준으로 찾다가 2002년 2,3년 거쳐 수도권 전역에 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됐다. 밤에 아이들 데리고 마실 갈수 있는 거리를 마을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치에 맞는 마을을 일구고 있고 현재는 70가구 정도 모여 살게 됐다. 처음에는 생태적 마을공동체를 지향에 따라 지역생협을 통해 먹거리문제를 해결하다가 먹거리를 자급할 수 있는 농사와 농촌과 도시의 생명순환구조를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껴 강원도 홍천에 생산공동체를 만들어 현재 30명 정도가 살고 있다. 문 :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부딪힌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최 : 1999년 당시 우리 안에 문제를 신앙을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열심을 냈었지만 그 열심이 과도한 나머지 독선이 됐다. 그때 분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이후 무엇인 옳고 그른지 학습하는 과정과 더불어 각자 삶의 어려움을 소통하고, 나누고, 치료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과정이 수련과정 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실패가능성에 대해 뿌리 깊게 고민하고 삶을 통해 공부하고 그 너머 주시는 은혜를 느끼는 삶을 살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와 자본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한 노력 문 : 이미 산업문화에 익숙해진 우리의 체질을 갖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살아갈 때 오는 문제점을 해결할 핵심은 무엇이었나? 최 : 우리 모두가 개인주의적 인간으로 길들여 있다는데 주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신과의 나와의 관계도 개인주의적인 부분이 많았다. 공동체를 인간관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의 근본적 변화를 갖기 위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를 비롯한 가치관의 변화를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산업문화의 힘이 한 개인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립하기 힘들다는 점을 주목했다. 현재 결혼과 독립에 투여되는 자본은 웬만한 청년이 벌수 있는 돈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고 자립적으로 생활을 할 수 있기 위한 생활자금조달에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보고자 했다. 또 임신과 출산은 창조사건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데 자본은 그 기간을 불안의 연속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출산이후에도 아토피를 비롯한 문명의 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채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문명이 만든 불안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기 때부터 자기 몸을 치유하고 이상 현상에 대해 스스로 치유능력을 회복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자본적인 삶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단(斷) 문 :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여기에 산업문화의 문제가 집약돼있다. 이 문제를 극복 가능하게 한 내면적 동력은 무엇인가? 최 : 회개이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갖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한 회개이다. 우리 공동체 또한 ‘대침묵’이라는 회개의 사건을 통해 ‘지적유희’에 머물지 않고 한발 나아갈 수 있었다. 홍천으로 가기 전 3년가량의 회개와 성찰의 시간을 갖았다. 지금도 성탄절기간은 가능한 침묵하며 지낸다. 성탄과 연말연초는 자본의 논리가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되는 시기임를 확인하고 그것을 끊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회개는 대화와 고민을 통해 하는 통상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심리적이나 종교적인 액세서리나 애드리브가 아닌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을 해야한다는 것이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회개의 개념이다.
김희헌 : 과거에 공동체적 삶은 이상적인 것이었다. 기장의 진보성은 사회문제에 대한 직접투쟁에는 민첩하지만 문명사가 갖고 있는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에 대한 시도는 없었다. 개신교운동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기독교사회운동은 어떤 시점이 되면 실체가 없어져버리는 3차산업과 같다.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실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초석을 놓는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갈 때 순수한 열정만으로 출발하더라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원시공동체적 나눔의 삶은 불가능하고 개인의 삶을 유지하면서 말하는 이상적인 방식은 허깨비이다. 중요한 것은 그 중간 지점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경제적인 나눔은 어떻게 하는가? 공동소유,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고백만 하면 쉽다. 최 :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소유구조를 갖고 있다. 재산을 공유하기도하고 교회 헌금을 통해 공유하기도 한다.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고백하면-진정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지-물질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삶은 어렵거나 힘들지 않다. 오히려 자본주의식 경제가 만들어내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져 불안하지 않고 가볍고 쉽다. 지금 돌이켜 보면 물질을 공유하기위한 결단을 막는 심리에 아우라같은게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것만 극복하면 그 심리적인 갈등은 아무것도 아닌 질문으로 바뀐 사례가 많다. 다양함을 인정하는 공동체
최 : 공동체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가 획일성이다. 영적인 상태나 자기정황이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지체가 맺는 영적인 형태는 백이면 백 다양해야한다. 주류, 비주류갈등이 없어야 한다. 나또한 누가 얼마큼의 재산을 공유하는지 잘 모른다. 재산공유의 방식은 각자의 삶의 정황과 영적인 상태에 맡게 공유하는 것이 좋다. 현재 공동체를 준비하는 모임이 많다. 그러나 그들을 지배하는 정서는 불안이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 하는가?’ ‘지금 나에게 주신 부르심이 맞는가.’를 고민해야지 ‘가능할까?’라는 고민은 불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끊어야 문제가 없다 어정쩡하게 끊게 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고 자본의 정서와 권세가 만들어내는 간고한 삶의 질서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 성원이 초기 단계 공동체 안에서 사역(역할)을 만들어 갈 때 자립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공동체가 재산을 관리하다가 자립이 가능할 때는 독립을 시키고 이후 그 성원은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을 공유한다. ‘사적소유냐, 공동소유냐, 희년적 소유냐, 원시공동체적 소유냐“라고 카테고리화하여 선택하는 방식이 당장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이러한 개념접근은 보다 복잡한 현실적 사태에는 기력해질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삶의 정황에 맞게 문제를 해결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최 : 이미 소유관계가 복잡히 얽혀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불가는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유하는 기풍이 형성되면 개인의 의지와 달리 쉽게 결단된다. 개인의 욕망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욕망을 대체할 공동체적 삶에 대한 다른 욕망을 만들면 관계의 변화가 생기고 욕망의 구조의 변화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본의 아니게 넒은 집에 이사 오게 된 공동체 한 성원은 미안해하고 부담을 갖는다. 그의 욕망이 달라지는 것이다. 문 : 사유화야말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악이라고 체화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더 아름다운 것을 경험했을 때의 이전 것에 대한 철저한 단(斷)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다. 최 ; 우리는 교육을 두 가지 방향으로 하고 있다. 세계관을 바꾸는 학습을 수련으로 생각하고 공부한다. 학위과정은 선호하지 않지만 웬만한 신학대학원에서 다루는 주제를 공부하고 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한스큉의 교회사, 들뢰즈, 화이트해드의 사회학, 역사적 예수와 같은 진보적 신학의 주제들, 민중신학적 주제들을 격주로 토요일 마다 50여명의 평신도들이 모여 공부한다. 그냥 단(斷)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우리 공동체가 민중신학을 대중적으로 가르치는 유일한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민중신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언어전환(민중신학의 언어를 쉽게 개념정리함)을 통해 가르치면 젊은이들은 도전을 받는다. 용어선택이나 언어전달의 어려움으로 민중신학이 확산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전달과정과 이행전략에서 취약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가 보완된다면 부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교육방법으로는 식(食)의(衣)주(住)에 관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수련을 하는데 그 방법은 단식이다. 몸을 근원적으로 비우면서 물질적 정신적 수련을 이어가는데 마을 가운데 수도원이 있는 이유도 몸과 마음의 수련이 일상에서도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 : 수유리에 살면서 외부에 직장을 갖고 있는 것은 젓줄을 외부에 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모순이다. 그래서 나는 탈출을 이야기 했다. 출애굽도 그러한 맥락이다. 새것을 찾기 위해서는 탈출해야한다. 누가 하는가? 애굽의 노예들, 지금이 괴로운 사람들, 오늘날 바벨탑의 노예들이 탈출해야한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갔다면 예수는 갈릴리로 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시골이다. 문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골로 탈출해야한다. 농촌의 소외와 분단을 극복하는 공동체 최 : 홍천으로 간이유가 그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적으로 지속적으로 가장 소외받는 사람들이 농민들이다. 그간의 개방정책으로 인해 일방적 지속적으로 농민과 농업에 히브리의 신음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이 땅에 신음하고 있는 주제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공동체가 주목한 또 하나의 주제는 분단문제이다.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하고 모색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소외된 사람들, 하나님의 가장 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현장은 농촌이고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한반도 평화 생명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고민하고 대안을 만드는 노력을 하고 있다. 기초적인 마을공동체와 농도상생공동체를 통해 몸이 분명하게 땅에 토대한 대안을 가지고 한반도 전체의 평화와 생명을 이야기할 때 공허하지 않을 수 있겠다. 한반도에서 전쟁무기를 없애는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제주 강정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살상무기는 20세기 인류의 죄악이 집약된 채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문제를 바로 봐야한다. 우리는 국제적인 평화운동이 한반도에 일어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청년 때처럼 머리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관념화되지 않을 수 있다. 문 : 예수께서도 갈릴리 농민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예수운동을 시작했다. 소작농, 날품팔이, 땅에 붙어먹고는 사는데 밀려난 사람들, 떠돌이, 로마∙바리새파 기득권자들로 인해 밀려난 사람들. 예수는 그 밀려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떠돌이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어떻게 땅에 농사짓게 하느냐. 농촌에서 생명문화권을 만들어야한다. 신발도 셔츠도, 모든 것을 우리가 만들어야한다.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어야 통일이 된다. 모든 것을 스스로 생산해 내는, 자본주의 문화권이 아닌 생명문화권을 만들어 건전하고 멋있는 문화권을 만들어야 평화와 통일이 가능하다. 최 : 우리는 떠돌이에 대한 관심을 청년으로 보고 있다. 과거에는 도시빈민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자로 있었지만 지금은 청년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활용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곳은 농촌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가라’가 아니라 행복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모형을 만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설득력을 높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 : 자기들끼리 멋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각(覺)과 단(斷)을 한 젊은이들이 집단적 예수, 집단적 모세가 되어 그들 스스로 21세기 갈릴리에 가서 이 떠돌이들을 그곳으로 끌어내어 새로운 문화권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을 넘어 인류적인 과제라고 본다. 최 : 공동체와 농촌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특히 농촌공동체에 분명한 희망을 두시고 계신 점 많은 힘이 된다. 감사하다. 문 : 지금까지 공동체를 일궈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례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만들어 보기를 권한다. 기도하고 마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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