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교육/4. 책 읽기

호모에로스. 고미숙.

양선재 2018. 7. 17. 22:44


고미숙씨의 호모에로스에 나오는 시절인연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어서 공유합니다.


삶에 있어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짝을 찾는 일이다. 함께 걸으려면 최소한 방향이나 시선이 같아야 한다. 그래서 시절인연이 아주 중요하다. 시절인연이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떤 강한 촉발에 의해 공통의 리듬을 구성하게 된 특정한 시간대를 뜻한다. 일종의 매트릭스 같은 것이다. 어떤 경우건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사건에는 두 사람의 성향 및 행로를 포함하여 시공간적 흐름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 대상이 누구냐보다 언제 어디서 만났느냐가 더 결정적이다. 즉, 어떤 특별한 ‘시공간적 배치’ 속에서 사랑이라는 특별한 감정이 생기고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절인연'이다. 시절인연이란 내 몸과 천지의 기운이 딱 상응하는 그 타이밍을 말한다. 여기엔 나이를 비롯하여, 계절이나 절기, 그리고 둘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 등이 두루 망라된다. 이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사랑이라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부연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의 리듬과 강도를 지니고 태어난다(이른바 사주팔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 리듬과 강도는 어떤 외부적 조건을 만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이런 시간적 흐름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배치가 형성되면, 그때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이상형을 찾아 헤매다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때가 무르익으면 누군가를 '만나지는' 것이다. 머릿속의 이상형과는 전혀 다른 상대한테 필이 꽂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상대가 이상형처럼 보인다. 둘 사이에 강력한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시절인연을 만나면 구체적인 행동방식은 저절로 결정된다. 매뉴얼 따위는 전혀 필요 없다.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가 아니라,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욕망이 표면으로 솟구칠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욕망이 솟아오르려면 시절을 타야 한다. 시절을 타게 되면 아주 작은 촉발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봄이 오면 겨우내 잠자고 있던 씨앗들이 순식간에 땅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서로 눈이 맞는다는 건 상대방 역시 같은 흐름을 탔다는 의미다. 만약 이 시절을 타지 못하면 한쪽에서 아무리 용을 써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는 법이다. 둘이 서로 다른 시공간적 좌표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절인연을 형성하는 주체는 자신이다. 그래서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존재의 궤적을 만든다. 존재의 흐름과 궤적, 그것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한다. 내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종결까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삶의 창조란 바로 이 ‘지금, 여기’를 구성하고 있는 내 몸의 리듬과 강도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을 하고 있다면, 사랑을 꿈꾸고 있다면 먼저 동선을 바꾸라. 동선을 바꾼다는 건 “일상의 차서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차’란 시간적 순서, ‘서’란 공간적 질서다. 차서를 재배치한다는 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순서를 바꾸고 하루의 활동들을 시공간적으로 다르게 안배한다는 뜻이다. 삶은 몸의 에너지가 서로 교호하는 물리적 장이다. 내가 리듬과 강도를 바꾸면 당연히 내 주변에 이전과 다른 물리적 장이 형성된다. 인연조건이 달라진다는 뜻. 그렇게 되면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와 활동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새로운 신체의 창조며 삶의 창조다.


사랑을 함에 있어 꼭 필요한 노하우가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삶의 서사’다. 서사란 사람과 사물이 마주칠 때 일어나는 사건의 흐름이다. 사랑을 원한다면 혹은 지금 운좋게 사랑을 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서사의 능력을 키우도록 하라. 다시 말하지만, 서사는 화술이 아니라, 나의 삶과 외부가 맺는 관계성의 문제다. 따라서 서사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대략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는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에 생생한 힘과 활력을 불어넣는 것. 물론 이 두 가지는 함께 맞물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