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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데이빗 가레자 동굴수도원

양선재 2014. 6. 22. 23:07

희망봉40 2014.06.20 06:00

http://blog.daum.net/snuljs/16501422 에서 복사한 글입니다.
조지아의 관광명소 중에는 기독교의 교회나 수도원등이 많고 특히 기독교가 전파되는 초기 선교에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데이빗 가레자 동굴수도원도 그런 종교관련시설의 한가지입니다.

 

앗시리아에서 조지아 지방에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하여 13명의 수도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고 합니다.6세기 때의 일입니다.

13명의 수도선교사들이 각자 선교할 지역을 선정하여 떠날 때 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데이빗 가레자(David Gareja)는

이 나라에서 가장 외지고 척박한 곳에 가서 수도를 하면서 선교를 하리라고 결심하였답니다.

그가 선정한 가장 척박한 땅이 바로 지금의 데이빗 가레자 동굴수도원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데이빗 가레자의 발길을 따라 가보기로 합니다.

 

큰 도로에서 데이빗 가레자 방향표지를 따라 들어선 도로는 아스팔트 포장은 되어 있지만 포장이 많이 파손된 2급도로였습니다.

초록색 초원으로 보이지만 땅이 척박하여 나무는 물론 풀도 잘 자라지 못하여 흔한 소나 양떼도 보이지 않는 지역으로 들어섭니다.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강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호수가 아니라 염호(鹽湖)라고 박사장이 설명해 줍니다.소금물 호수란 것이지요.

버스에서 내려 염호에 다가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과연! 바닷가의 개펄에서 보던 풀들이 보입니다.

경이롭게 생긴 식물이 눈에 띠기도 합니다.

오래동안 버스에 앉아 있던 우리 일행들은 잠시나마 이 길을 걸어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성지순례를 하는 기분으로 이 길을 걸으며 데이빗 가레자를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보니 과연 호수가 식생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황폐화를 촉진할 것 같아 보입니다.

이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증과 신비감이 더해지는 길이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포장도 안된 이 길을 데이빗 가레자는 오로지 구도의 길만을 생각하며 걸었겠지요.

폐허가 된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을 지나갑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전혀 없는 집들입니다.

이곳은 소련시절 정부에서 강제로 주민을 이주시켜 이곳에 정착시키려고 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사회주의 정부가 사라지고 국가에서 주던 배급이 끊기자 이주했던 사람들이 생업을 찾아 떠나버려 황폐화된 것이라 합니다.

드디어 데이빗 가레자 동굴수도원이 있는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그 동안 우리가 지나 온 황무지 지역보다 더욱 황폐한 듯이 보이는 지형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노천광산지대에 온 듯한 느낌입니다. 과연 척박한 땅인 것이 맞습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군요.

 

처음에 데이빗 가레자가 이곳에 도착하여 바위에 판 동굴수도원입니다.

아무리 준 사막지대라 하지만 그래도 간혹 비도 오는 곳인데 이곳에서 어떻게 비를 피하고 잠을 잘 수 있었을런지요.

 

데이빗 가레자를 따르는 제자 도도(Dodo)와 루치아네(Luciane)도 스승의 바위 굴 근처에 자신들의 동굴을 팠습니다.

이들의 소문을 듣고 제자와 신자들이 더 모여 들어 동굴수도원의 숫자는 더 늘어났지요.

건조한 기후의 이 지역에서 수도사들은 식수를 어떻게 구했을까요.

넓은 바위에 홈을 파서 빗물이 웅덩이에 모이도록 수로를 만들어서 식수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급수시설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 옛날 수도사들이 빗물을 모아 쓰던 빗물모으는 시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데이빗 가레자의 신심에 감복하고 그의 가르침에 따르는 신자들도 늘어나자 왕실에서도 점차 데이빗 가레자 수도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왕실과 귀족들이 후원을 하게 됨으로써 동굴수도원에는 교회와 제대로 된 건물의 수도원들이 계속 지어졌답니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조지아 왕가의 황금기에 이 수도원들도 크게 발전하게 되었답니다.

이 시기에 데이빗 가레자 수도원은 단순히 수도사들이 고행을 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와 종교가 함께 발전하고 경제적으로도 발전을 이룬 도시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1265년 몽골군의 침공으로 크게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수도사들은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수도원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615년에는 강성한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게 되었는데 페르시아 군은 시설을 파괴할 뿐 아니라

 많은 수도사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후 러시아에 볼쉐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조지아가 러시아의 지배아래 들어가자

수도원은 폐쇄되고 인근에도 전혀 사람이 살지않는 폐허로 변해버렸습니다.

소련시절에 강제로 주민을 집단 이주시켰던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지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하던 기간중에는 이곳 동굴수도원지역을 군대의 포사격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아무리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부의 소행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를 한 것이지요.

소련군의 포격훈련은 수도 트빌리시에서 많은 젊은 대학생들이 계속해서 데모를 한 뒤에야 겨우 멈추었다고 합니다.

많은 수도사들이 데이빗 가레자 동굴수도원이 있는 산 위에 동굴을 파고 그곳에 수도원이나 교회를 짓고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들은 박사장이 세심하게 준비해 준 도시락을 들고 산위의 동굴수도원 탐방길에 올랐습니다.

(사실 이곳에는 점심을 먹을 만한 식당도 없었습니다.)

산위로 올라가며 보니 초기 수도원들과 교회가 한 눈에 들어 옵니다.

엇! 우리땅 걷기 도반의 한 분인 꿀단지님을 여기서 보네요.

조금은 가파른 산길이지만 모두들 씩씩하게 잘 올라가고 있습니다.

첫번째 동굴을 만납니다. 이곳에는 약 5천개의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수도원이나 교회 예배당 뿐 아니라 공동식당,주거구역으로 이용된 동굴들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 산상의 동굴수도원들이 유명한 것은 많이 훼손되고 없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프레스코 화가 남아 있기때문입니다.


 

내부가 복층구조로 된 동굴들도 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오후 1시가 되었기에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 화가 있는 동굴에서 도시락을 먹습니다.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화-너무 많이 훼손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는 동굴은 공동체가 사용하던 것인 듯 와인저장시설도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계속해서 동굴탐사를 합니다.

조지아 정부에서는 데이빗 가레자 동굴사원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아제르바이잔과의 접경지역으로 두 나라의 영유권 주장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이 근처가 두 나라의 국경이 접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조지아의 국경수비대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말은 안 통해도 무엇이 웃기는지 아내와 군인들이 함께 활짝 웃고 있습니다.

관광 온 조지아의 여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