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3모작하라, 그게 고령화 해법 정년 때까지 30년은 일하고 그후 10년은 보람된 일 찾고 칠십 넘어선 자연과 함께 하세요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길을 잃었다. 기계도 맥을 못 추니 사람은 당연하다 싶었건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승의 전화기 속 음성은 안타까움에 젖어있었다. "그래서야 어찌 기자 생활을 ... ." 스승에게 제자는 항상 위태로운 어린애 같은 모양이다. 滿山紅燁이란 말은 이맘때의 설악산에 딱 맞는다. 상강(霜降) 추위가 덮쳐 더 선명해진 풍경과 알싸해진 공기에 둘러싸인 '현강재(玄岡霽)'는 볕 좋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었다. 40평 남짓한 공간은 천장이 높아 시원했고 창틈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비 내리는 날에는 자연의 풍금 소리가, 눈 쏟아지는 밤에는 墨畵처럼 추억이, 맑은 날에는 별들의 합창이 들릴 것이다. 둥그런 공간 자리 잡은 창틀은 산수화 한 폭을 담은 액자였다. 가깝게는 달마봉, 멀리는 울산바위가 계절에 따라 변색할 것이다.
거기서 안병영(71) 전 교육부장관은 네 번째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농부가 된 副총리는 새벽 4시 일어나고 한철에는 8시간쯤 땅을 가꾼다. 400평 중에 250평엔 과실수, 100평엔 농사를 짓는다. 설악과 동해와 제 힘으로 가꾼 결실을 함께 맛보는 삶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러 가던 중 인제 근처에서 가슴 철렁한 연락을 받았다. "겨우 세상의 눈을 피해 안정을 찾았는데, 다시 언론에 등장하기 싫다"는 것이 었다. 겸양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심각했다. "아내가 더 난리야, 몇 년 만에 부부 싸움을 했어... . 돌아가." 믈러설 수 없기는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인간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은둔(隱遁)의 미학을 듣는 것은 이처럼 어려웠다. 얼굴을 마주한 농부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시골살이만 말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입을 열었다.
#운명을 바꾼 나들이 6년 전 그는 연세대(행정학과)에서 정년을 맞았다. 그 10년 전부터 안 전 부총리는 퇴임하면 시골에 가겠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되도록 멀리 갈 궁리를 했다. 서귀포, 남해, 통영, 속초 등이 후보지였는데 그가 작정한 곳은 속초였다. -고향이 강원도입니까? "서울 토박이죠. 마침 가까운 친구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강추' 하더군요. 제가 원래 산을 좋아했습니다.설악산이 바로 지척이잖아요. 동해도 금방인 데다 친구까지 있어 별 고민 안 하고 결심했습니다." -지인들이 말리지 않던가요? "아마 2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도 저를 '그곳 사람' 이 다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처음 정착한 곳은 여기가 아니고 속초의 아파트였지요. "산과 바다 외에 적당한 크기의 속초가 마음에 들었어요. 서울 연희동 집은 아들이 살고 있고 33평짜리 아파트를 구했습니다. 아내와 단둘이 살기에 딱 알맞은 크기였어요." -시골행을 택하는 데 제일 큰 걸림돌이 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는 순순히 동의했어요. '늘그막에 영감 없이는 살아도 친구 없이는 못 산다' 든가 손자의 재롱, 쇼핑 재미, 고급 문화에 대한 미련이 다 아내로부터 비롯되는 겁니다. 저도 그랬다면 시골 가기를 처음부터 포기했을 겁니다." -나이 들면 건강이나 의료에 대한 걱정도 있을 텐데요. "지병(持病)이 있거나 잔병치례가 끊이지 않는다면 의료 시설이 좋은 대도시를 떠날 수 없다고 모두들 생각하는데 이런 면도 있어요. 의학적으로 검증된 長壽의 세 가지 요건이 운동, 음식, 조기 검진이지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시골은 운동과 섭생에는 최적의 조건이잖아요. 조기 검진은 마음의 문제이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시골 외진 곳에 살면 강력 범죄에 무방비일 것 같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좀도둑은 있어도 강력볌은 거의 없습니다. 정 불안하면 보안 업체 도움을 받으면 되는데 전 여기 사는 동안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뭘 그리 가져갈 게 있다고 여기까지 오겠어요." -그런데 속초의 아파트 생활을 2년 만에 접었습니까? -운명을 바꾼 발걸음이었겠습니다. "마침 그 집 부부가 밖에 나와 있었어요. 차 한잔 하자며 손을 이끌더군요. 알고 보니 그분들도 서울에서 왔는데 속초의 아파트에 산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대뜸 이러시는겁니다. '아니 서울 분이 이곳까지 내려와 아파트에 산다니 말이 됩니까?' 그 말을 듣고 불현듯 뭔가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뭡니까, 그게. "' 속초는 기착지(寄着地)일 뿐 종착역은 아니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아파트에서도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고 동해를 안고 있지만, 그곳은 역시 人工의 도시일 뿐 제가 그리던 자연의 품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달은 겁니다. 그 부부의 주선으로 지금의 땅을 마련해 집을 지은 겁니다." -거실은 천장이 온통 유리로 덮인 天窓이고 내부가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구조입니다.
"아내가 그런 재주가 있어요. 설계, 인테리어, 시공에 아내가 다 관여했어요. 농사짓는 땅은 그 2년 뒤 샀지요."
#농사꾼의 삶 '여기 와 살면서 자연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처음 배웠다. 서울에서는 태풍, 폭설, 천둥, 벼락을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남이 일이었고 내게는 생활에 불편을 주는 정도였다. 이곳에선 그런 자연의 손길을 일상에서 만난다'(불로그 중에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몇 년 안 돼 전원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가 추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합니다. 1년에 몇 번 1m이상 폭설이 내려 꼼짝 못할 때도 있지만 그개 나름대로 엄청난 情趣를 주기도 합니다. '외경(畏敬)스럽다'는 말, 그 뜻을 저는 여기서 깨달았어요." -이런 질문 실례인데 궁금해하는 분이 많을 것 같아서... , 돈은 얼마나 들었습니까? "허허, 집터 사고 집 짓는데 그리 큰돈이 들지 않았어요. 우리가 농담으로 서울 강남 아파트 몇 평 값이면 된다고 말합니다." -시골살이 자랑 좀 해주시지요. "뭐랄까, 나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할까, 남과 척지지 않으려고 하기 싫은 일도 할 필요가 없고 실속 없이 스케줄에 쫓길 길도 없지요. 알량한 체면이나 하찮은 명예에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뿌리치기 힘든 연고의 늪에서도 해방될 수 있습니다. 늘그막에 세속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대도시 젊은이들은 잘 모를 겁니다." -독사나 야생동물로부터 받는 위험도 있을 텐데요. "저기 뒤편 창문으로 보이는 오솔길, 저기 올라가 끝까지 다녀오는 데 한 시간쯤 걸려요. 워낙 개발이 안 된 곳이라 야생동물이 많아요. 저번에는 잼버리 야영장 근처를 차를 타고 지나다가 200kg 남짓한 멧돼지가 돌진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어요, 전 무섭다기보다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은 걸 후회했어요." -카메라요? -경제적으로도 실제로 도움이 됩니까? "되지요. 우선 주거비가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고 심야 전기를 쓰니 냉. 난방비도 적게 듭니다. 손수 작물을 재배해 먹으니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재래시장이나 농협 마트에 다녀오면 족하지요." -농사 지을 때는 무리를 하면 안 되지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제가 100평 정도를 가꾸는데 그것도 한여름에는 7~8시간이 걸려요. 잡초와 한바탕 씨름하고 나면 또 벌레들이 괴롭힙니다. 밤이면 온몸이 결리고 여기저기 긁기 바쁘지만, 흠뻑 땀을 흘린 뒤의 상쾌함은 말할 수가 없지요, 교육부장관 할 때보다 체중이 7kg이나 줄었습니다. 그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고요." -주로 무엇을 십습니까? "고추, 상추, 깻잎, 배추, 고구마, 토마토, 옥수수, 땅콩... . 다 먹기가 벅찰 정도지요. 나무들은 심은 지 3년쯤 지나면 작은 수확이 시작됩니다. 저기 저 배나무도 가냘파 보이지만 벌써 배(梨)가 달렸잖아요." -때론 서울이 그립지 않습니까. 평생을 사신 곳인데. "처음 3년간은 의도적으로 서울에 기웃거리는 일을 극력 피했습니다. 공식 모임에도 전혀 참석하지 않고 내 편에서 친지들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 가야 할 일이 있으면 몰아서 해결하고 왔고요. 뭐랄까, 情떼는 작업을 한 건데 이유가 있어요. '서울에서 잊힌 존재'가 돼야 여기 발붙이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생각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 인생 3모작 안 전 부총리는 인생을 3모작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회사에서 정년을 맞는 55세까지 30년가량 일하고 그 뒤 10여년은 적성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을 하며 칠십 넘어서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비우며 살자는 것이다. 그개 고령화 사회를 살 해법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인 관계를 그렇게 단절하는 게 모질어 보입니다. " 하하,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건 아니예요. 相談을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요." -상담? "엣 제자들이나 친지, 저와 예전에 함께 일했던 교육부 공무원들한테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메일로 상담 요청이 꽤 자주 들어옵니다. 살면서 어려운 일, 업무를 보다 곤란한 일들이 생기면 해오는 상담 요청이 하루에 1~2건씩은 꼭 들어와요. 그럴때마다 적지 않은 기쁨을 느껴요. 내가 아직도 할 일이 있다는 느낌 같은 거지요." -인생 3모작론(論)' 에 대한 反響이 있던가요? "인생 2모작에 대해선 주변에서 이미 확산되고 있는 걸 확인하고 있습니다. 50대 중반인 제자 한 명은 대기업의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증까지 땄다더군요. 올해 육십 된 교수 한 분은 전문 심리 상담사가 되는 게 퇴직 후의 꿈이랍니다. 그것을 위해 2년째 대학원에 다니고 있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긴 했어요." -재미있는 일? -어떤 얘게였습니까? "라인펠트 총리는 자유보수온건당 당수로 중도 우파 연립정부의 젊은 총리입니다. 그가 올 2월 7일 스웨덴 일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웨덴인들은 첫 직장에서 30년간 열심히 일하고, 다음엔 좀 더 느슨한 일자라로 바꿔 20년간, 즉 75세까지 일터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 '자연으로 회귀' 라는 건 없지 않습니까? " 제가 말한 제3기는 인생의 '附錄' 같은 것이니 그리 개의할 필요는 없어요. 단 그가 75세까지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는 꽤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평생 노동자화? 현행 연금 수준을 유지하려면 더 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지요. 유럽의 많은 나라도 한때는 조기 퇴직을 권장했지만 그개 노후 연금과 의료 보장 체계에 엄청난 부담을 줄 줄은 몰랐던 겁니다." -그 문제는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확보하려면 오래 일해야 하는데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는 2000년대 초 이후 퇴직 연령을 대체로 65 세 수준으로 잡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나라에서는 퇴직 후 연금을 제대로 받으려면 고용기간을 45년 채우도록 규정하고 있교요." -우리는 정반대 아닙니까 정년이 무척 이른데요. "생애 주기를 교육. 고용. 퇴직 후로 나눠보면 우리는 형편이 어렵다는 게 드러납니다. 맨 먼저 학업 기간이 유례없이 길지요. 어마어마한 과잉 투자도 일어나고 있고요, 반면에 용 기간은 너무 짧고 그나마 불안정합니다. 노동생산성도 높은 편이 아니고요 . 그런가 하면 노후 보장은 충분하지가 앖습니다. 기대 수명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데 상황이 이러니 퇴직 후 30년을 '고단한 여생' 이라고 하는 겁니다." -해법이 뭘까요? "일을 한 뒤에 '보람' 을 느낄 수 있는 일이나 '놀이' 처럼 재미있는 일을 하려면 '평생 교육' 을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진국 중에 '학습 복지(Leamfare)'라는 개념에 주목하는 나라도 늘고 있고요."
# 교육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어려지지 않아야 안 전 부총리는 교육부장관을 두 번 지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12월부터 97년 8월까지,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월까지다. 그가 만든 정책은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EBS 수능강의, 학교운영위원회, 초등 영어 실시 같은 것들이다. -교육부장관 재직 시 e-러닝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까? "당시로선 혁명적인 정책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수많은 반대와 의심이 있었지만 제 소신은 확고했어요. 교육만큼은 이념을 배제하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 후손과 현재 학생들이 어떻게 미래를 꿈꾸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리와 당락에 좌지우지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이념 성향이 정반대지요. "앞서 말했듯 교육정책이 이념에 따라 변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러닝 정책을 처음 장관 할 때 시작했는데 두번째 장관 하면서 세계 최고의 반열이 됐습니다. 그때 정말 기뼜어요." -그렇지만 아이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마음 아픕니다. "제일 큰 원인이 뭐랄까, 아이들에게 '자기 시간'이 없다는 거지요. 어린 나이에 창의성을 기르고 지덕체(智德體)를 함양해야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을 오기길 반복할 뿐입니다. 전 우리나라의 지나친 주입식 교육이 창의력의 싹을 자른다고 봅니다. 정치 얘긴 안 하기로 했지만.... 정권의 이념이나 통치자의 소신에 따라 과도하게 엘리트 교육이나 형평성, 어느 한쪽으로 크게 치중하는 교육정책은 지양해야 하지요." -전에는 그리 부각되지 않았던 학교 폭력과 공교육에 대한 부작용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요. 원인은 사실 '교육적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학교 폭력은 가정에서부터 학교에 이르기까지 청소년들이 마음 편히 의지할 곳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흥적으로야 강력한 대책이 좋을 것 같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역시 가정 . 학교 . 사회가 서로 책임을 마루기보다는 함께 이들을 감싸 안는 것뿐입니다." -댁에 의외로 책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서울 연희동 집에 다 놔두고 왔어요. 필요할 때만 가져다 보지요." --평생 학자로 살아오셨는데... . "내년 1월쯤 출간을 목표로 책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통합 모형이랄까, 좌우 협력과 노사 협력 모델 같은 거지요. 제가 주목하는 나라는 오스트리아입니다. 한때 오스트리아는 국민마저 독일에 통합하는 날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국가였지만 지금은 유럽의 대표적인 강소국(强小國)이 됐습니다. 그 비결을 찾아보는 작업입니다." -그럼 정치학 책이겠네요. "물론 정치경제적 접근이 주조를 이루지만 지성사, 문화사적 접근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처럼 선생 노릇을 오래 한 사람은 전공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지요." - 우리나라는 미국 일변도인데 유럽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있습니까? 유럽 현대사 속에는 한국의 미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들이 보물처럼 여기 저기 숨겨져 있지요. 그걸 캐내는 것이 제가 주력하는 지적 작업입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언론을 싫어합니까? "조용히 있고 싶은데, 지금 시절도 소란스럽고... , 아내는 제가 두 번째 교육부장관 할 때도 반대했습니다. 학자의 길을 걷기만을 바랐던 거 같아요."
미시령을 향해 달리는 백미러 속에 우두커니 서서 기자를 지켜보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인생 3막을 열고 있는 그를 소란스럽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문감식의 '하드보일드' 에서- |
지나 온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였던 것을
고성서 시골살이 10년,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연세대(정외과)를 졸업했다.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를 지냈고 김영삼·노무현 정부에서 두 차례 교육부 수장을 지냈다. 교육부 직원들로부터 역대 가장 존경받는 장관에 뽑혔다. 정년 후 아무 연고도 없는 강원도 고성 땅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실천하는 우리 시대 흔치 않은 선비다.
다들 그랬다. 부총리에 장관까지 하신 분이 아무 연고도 없는 강원도 땅 그것도 휴전선 턱밑 고성에 가서 산다고 하니 얼마나 갈까 했다. 길어야 2~3년, 아니 나이를 고려한다면 1년 이내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도록 소식도 없다. 그러기를 어언 10년, 그는 철저하게 시골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쯤 하면 아는 사람은 안다. 안병영(75) 선생이다. 올해로 강원도 땅에 똬리를 튼 지 10년이다. 정말 어렵게 만났다. 서울과 인연을 끊고 사는 분을 모시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이정민 중앙SUNDAY 국장과 나는 문안 인사 겸 들렀다는 변명 아래 기습 방문했다. 정치 얘기는 않는다는 조건 아래 간신히 인터뷰에 성공했다.
노부부의 고집을 꺾는 일이 고목나무에 꽃피우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훨씬 지난했다. 그리고 선생과 나의 30년 우정이 한몫했다.
-10년이 다 됐다. 고향이 이북이신가? 하필이면 휴전선 접경 고성 땅에 터를 잡으셨나?
“서울 토박이다. 아내가 개성 출신이지만 고성과는 거리가 있다. 정년이 가까워오면서 서울 탈출을 꿈꾸었다. 서귀포·남해 등 따뜻한 남쪽을 고려했다. 그런데 나보다 일찍 은퇴해 속초에 살고 있던 친구가 속초를 ‘강추’했다. 처음에는 속초시내 작은 아파트를 빌려 살았다. 설악이 내 맘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산이 좋으신가?
“산에 가면 심신이 즐겁다. 산에서는 세상만사가 부질없게 여겨지고 온갖 시름이 순간 사라진다. 좌절·분노·우울·낭패감 등 어두운 그림자들이 사그라지고 희망과 자신감이 솟는다. 산은 평등하다. 부자와 빈자, 잘난 이와 못난 이가 따로 없다. 서울에 살 때도 누가 산에 가자고 연락 오면 만사를 뒤로 미루고 산행에 나섰다. 아니 산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심쿵심쿵’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내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주택이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가끔 서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완벽한 촌사람이었다. 그래서 값싼 고성에 땅을 구입해 집을 지었다. 설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내가 건축가 못잖은 내공을 지녔다. 우리 내외가 정성을 다해 집을 지었다. 대처에서 건축자재도 직접 구입했다. 집이 자식 같다. 창밖을 봐라. 울산바위의 웅자(雄姿)가 손에 잡힐 듯하다.”
-왜 내려오셨나?
“내가 내 생활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서울에서 늘 사회적 약속에 허덕이며 살았고, 스케줄에 쫓겨 살았다. 체면 때문에, 남과 척지지 않으려고 싫은 일도 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적이 많지 않았다. 여기서는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마음에 내키는 일을 내 의지대로 하고 산다. 체면이나 하찮은 명예는 상관할 필요가 없고, 뿌리 깊은 연고의 늪에서도 해방된 느낌이다. 나의 유일한 취미인 산행도 하고 농사도 짓고. 서울에 산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를 만든다. 서울에 있으면 ‘정치’도 너무 가깝게 보이고 그래서 가끔 앙앙불락했다. 얼마간 떨어져서 보면 조금은 ‘저 너머 동네 일’처럼 느껴진다.”
-다들 시골에 살면 외롭다고 한다.
“많이 받는 질문이다. 외롭지 않으냐고. 또 밤낮 그 산, 그 바다를 보면 지루하지 않으냐고.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잘 지낸다. 현대인은 명동 한가운데서도 외롭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런 실존적인 얘기가 아니다.
여기서도 나름 바쁘다. 산행 코스만 해도 끝이 없고, 알량한 전공 공부에 쫓겨 못 읽었던 소설과 시들도 그리 많을 줄 몰랐다. 사색하기, 음악 듣기, 자신과 대화하기에 바쁘다. 텃밭 농사도 장난이 아니다. 맞다. 가끔 외롭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기 때문에 오히려 감미롭더라. 나는 늘 검박한 삶, 그러면서 아름답고 품격 있는 삶을 갈구하며 살아 왔다. 이것들은 자연에 가까이 할 때만 가능하다. 대도시의 삶 속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왔다.”
-서울은 자주 가시나?
“어쩔 수 없이 가끔 간다. 가도 가능하면 일만 보고 돌아온다. 마치 자칫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것 같아서 괜히 불안하다. 서울의 분답(紛沓) 속에서 나 자신을 잃으면 그때는 다시 나만의 행복한 시간으로 영영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이곳으로 내려온 후 가까운 친구가 많이 다녀갔다. 그러면 으레 자기들도 이런 데서 살고 싶다고 하고, 더러는 꼭 실행하겠다고 근처 땅값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돌아가서는 항상 똑같은 얘기다. ‘안 되겠어. 같이 내려가자니 마누라가 당장 이혼하자네. 그건 그렇고. 자네 그 외진 데서 어떻게 살아. 나는 사흘도 못 견뎌.’ 그러면 나도 장난기가 발동해서 정호승의 시 한 구절로 근사하게 대답한다. ‘외로우니까 사람이지. 외로운 게 얼마나 감미로운데.’”
-그러고 보니 탈 서울 10년, 이제 학자라기보다는 농사꾼의 느낌이 물씬 난다.
“농사일 쉽지 않다. 사연이 많다. 집 앞 앵두나무는 제법 풍성한 수확도 거뒀는데 이태 전 태풍에 죽더라. 연전 양양 5일장에서 사온 감나무도 끝내 모진 겨울을 견디지 못했다. 나무마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멀쩡하던 나무가 죽으면 그와의 첫 인연까지 복기(復棋)되어 안타깝다. 그래서 모진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은 나무도 뽑아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장난 삼아 혼자 ‘전사자 묘역’이라고 이름 붙이고 아침저녁 물 줄 때도 의례(儀禮)처럼 그놈들에게도 물길을 보낸다. 식품이 생산되어 식탁에 오르는 데 소요된 거리를 푸드마일리지(food mileage)라고 하더라. 그런데 내 경우 음식의 대부분이 텃밭에서 손수 재배한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니 푸드마일리지는 제로에 가깝다. 흔히 계절과 지역의 특성에 맞는 에너지를 섭취하는 게 최고라고 한다. 식품을 제철에 텃밭에서 손수 가꾸어 먹으니 매우 행복하다.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육체노동의 역사였다. 나는 평생 책상머리에서 정신노동만 하며 살아 왔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먹거리는 스스로 수확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시골에 살면 적어도 여름에는 반자급자족 수준의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더구나 나 같은 연금생활자에게는 시골살이가 딱이다.”
-농사가 쉽지 않다고 들었다.
“어렵다. 나훈아의 ‘잡초’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잡초가 골칫덩이다. 잡초가 맹위를 떨치는 여름 한철에는 적어도 하루 대여섯 시간은 잡초 뽑는 데 시간을 보낸다. 긴 가뭄 뒤에 비가 오면 반갑기 그지없으나, 비 온 후에 더 기승을 부릴 잡초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잡초와 씨름하다 보면 내가 이 짓을 하려고 왔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2, 3일만 소홀히 해도 농토가 온통 잡초 천지이니 어쩔 수 없다. 그들과의 전투가 일상사가 되었다.
실제로 호미로 잡초 캐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앉았다 일어났다 계속 움직이며 잡초를 캐자면 무릎 관절과 허리에 적잖은 부담이 온다. 요사이 농촌에서는 밭 매는 아낙들이 엉덩이에 부착해서 움직일 때마다 덜렁덜렁 따라 이동하는 스티로폼 의자를 많이 사용한다. 보기엔 우스꽝스럽지만 매우 유용하다. 그런데 나는 다리통이 커서 간이의자로만 사용한다. 여름철 땀이 많이 나면 온갖 날벌레가 몰려들어 괴롭힌다. 언젠가 잡초를 뽑다가 벌에게 왼쪽 눈두덩을 제대로 쏘였다. 순식간에 눈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얻어터진 ‘록키’처럼 얼굴이 달라지니 우리 집 강아지까지 놀리며 마구 짖어댔다. 잡초도 세상 어디 또 누구에게는 꼭 필요한 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잡초를 꼭 뽑아야 할 경우 나름대로 얻은 교훈을 공유할까 한다.
첫째는 인내와 끈기로 임하자. 잡초 제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하면 그런대로 해 볼 만한 싸움이다. 방심과 게으름, 미루기는 금물이다. 매일 전사(戰士)처럼 결의에 찬 모습으로 싸움터로 나가자. 잡초가 뿌리를 깊게 내리기 전에 선제공격하자. 매일 하는 것, 하루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왕도다.
둘째,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농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잡초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 이왕 해야 할 것이면 즐겁게 일하는 게 상책이다. 누구는 잡초를 두고 ‘아직 약효가 검증되지 못한 약초’라며 옹호한다. 그래서 이제는 잡초와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친해지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숙제다.”
-와, 잡초 관련 책을 쓰셔도 되겠다. 상당히 철학적인 접근이다. 농사도 짓지만 본업은 학자가 아닌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꾼으로 지낸다. 늦봄부터 여름, 초가을까지는 햇빛 때문에 새벽 농사일이 필수다. 새벽일을 마치고, 낮 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책을 보다가 저녁 무렵 다시 밭에 나간다. 300평이지만 두 노인이 하기에는 힘에 부칠 때가 많다. 긴 겨울에는 책을 보고 글을 쓴다. 여기 와서도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 등 서너 권의 책을 냈다. 눈 내리는 겨울 밤, 글을 쓰며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를 듣는다. 사방이 적요해 내 숨소리까지 크게 울린다. 산골 사는 매력이다. 멀리서 여우 우는 소리라도 들리면 더욱 좋으련만.”
-다들 귀거래사를 꿈꾸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로 행하기를 두려워한다.
“맞다. 그동안 많은 지인이 ‘시골살이’에 대해 내게 물어왔고, 또 더러는 직접 이곳을 찾아 살펴보고 가기도 했다. 적지 않은 관심을 피력했지만 주변에 ‘탈(脫)서울’을 감행한 사람은 없다. 내가 서울을 떠날 때 모두가 2년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올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 그들도 이젠 내가 ‘이곳 사람’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이 고독·외로움·소외감 등 심리적인 어려움도 걱정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심각한 문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세상 사는 재미를 찾은 이에게는, 황혼 무렵 서산에 걸린 저녁노을을 홀로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이가 자연과 교감하면서 내면적 충일(充溢)을 만끽한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탈 서울을 실제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데 집사람이 절대 반대라서’가 가장 많더라. 그러면서 부인이 ‘늘그막에 영감 없이는 살아도 친구 없이는 못 산다’라든가 손자 재롱, 쇼핑 재미, 고급 문화에 대한 미련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서울 떠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예 시골 가기를 포기하는 게 맞다. 어렵사리 부인을 설득하더라도 약발이 오래 가기 어렵다. 다음은 건강 및 의료 걱정이다. 지병이 있거나 잔병치레가 끊이지 않아서, 혹은 만약의 위급한 사태가 걱정돼 큰 병원이 있는 도시를 떠날 수 없다고 한다. 맞다. 건강 걱정을 머리에 달고 다니는 사람에게 시골행은 무리다. 그러나 이 경우 재고의 여지는 있다. 실제 의학적으로 검증된 장수(長壽)의 세 가지 요건은 운동과 음식, 그리고 조기 검진인데, 따지고 보면 시골은 운동과 음식 등 섭생에는 최적의 조건이고 조기 검진은 마음의 문제이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또 보안과 연관된 불안감이 자주 제기된다. 시골 외진 곳에 살면 범죄에 무방비가 아니냐는 얘기다. 당연한 걱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 지방 소도시나 산촌의 경우 좀도둑은 있어도 강력범은 거의 없다. 보안업체 도움을 받으면 이 문제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
-시골살이의 실질적인 장점은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매우 유리하다. 한국 노인 대다수가 ‘100세 시대’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채 노령기에 접어들었다. 물가가 비싸고 소비 수준이 높은 대도시에서 여생을 보낸다는 것은 무척 버겁다. 시골에 살면 의식주 부담은 확 줄어든다. 생활비를 낮추면서 삶의 조건을 크게 개선하고 만족도도 높일 수 있다. 또 자연의 혜택을 들 수 있다. 신선한 공기, 맑은 물, 흙은 우리 삶의 원초적 바탕을 건강하게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최상의 먹거리, 볼거리, 일거리를 제공한다. 그뿐인가. 농촌에는 도시가 토해내는 소음과 공해, 갈등과 경쟁 대신 평온과 순리, 정신적 여유와 평화가 감돈다. 나는 ‘익명성’을 무척 좋아한다. 익명은 사람을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든다. 이런 외진 시골에 살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묻혀 살 수 있어 너무 좋다. 자연은 무엇보다 지식인이나 예술가에게는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도시에서 쫓기고 부대끼면서 마지못해 해야 하는 작업 속에서 우리는 ‘정석 풀이’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자연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신비에 가까운 생명력을 선사한다. 관조와 명상, 상상력과 통찰력을 일깨우고 대안과 초월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골에 살면서 매일매일 생각하는 방법을 새롭게 터득하고 있다.”
-일생 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지나간 꿈이 되고 말았지만 ‘사상계’와 같은 지식인 잡지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1953년 창간되어 60년대 말까지 우리 민족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한 매거진이다. 나와 같은 4·19 세대에게는 정신적 젖줄이었다. 4·19는 ‘사상계의 아들’과 같다. 한국 사회의 난맥상은 ‘사상계’와 같은 지성지가 없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선생께서도 이제 인생의 황혼기다.
“황혼기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우리 세대는 모진 세월을 숨 가쁘게 꾸역꾸역 살아 왔다. 전형적인 농업사회에서 태어나 산업사회와 후기 산업사회를 겪었고, 일제와 건국의 소용돌이, 한국동란을 거치며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의 주역으로 뛰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환희와 좌절, 영욕이 교차했고 때로는 생사를 넘나드는 절체절명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 친구의 글에 가까운 친구들이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그 글을 접하며 옛 친구들이 이제 이승과 저승에 고르게 포진해 있구나 생각했다. 이들 한 명 한 명의 생애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아마도 그들 개개인도 하나같이 굴곡진 시대와 거센 세파에 시달리며 실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으리라. 이미 죽어간 친구들은 자신들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병석에 있는 친구들은 또 얼마나 외롭고 허전할까. 인생이 생로병사라는데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남은 것은 병(病)과 사(死)밖에 없다. 다만 병과 사의 틈 사이에서 쥐꼬리만큼 여생을 가치 있고 보람되게 좀 더 존엄하게 엮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 생각해 본다. 지나 온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였다고.”
선생과 나는 격동의 80년대 후반 처음 만났다. 스무 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고민과 삶에 대해 얘기하고 가끔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30년을 함께해 왔다. 나를 배웅해 주는 선생 내외분의 한층 더 하얘진 머리카락이 봄볕에 눈부시다. 목련꽃 피는 언덕에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어야 하는 박목월의 4월이 저만치 떠나가고 있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선비 안병영
이정민 편집국장 | 제 호 | 2016.04.29 15:13 입력
대학 교수와 두 차례의 교육 부총리. 총리 후보 물망에도 몇 번 올랐던 분. 그만 하면 성공한 인생이요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커리어 아닌가요.
명사들 중에 은퇴 뒤 고향 마을에 전원주택 짓고 반농(半農) 반도(半都)의 풍류를 즐기는 분들은 더러 봤지만 서울 토박이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원도에 낙향해 집 짓고 텃밭 매는 농사꾼을 자처하다니요? 한두 해도 아니고 10년 세월을 말이죠.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를 만나기 위해 강원도 고성으로 향하는 내내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말이 농삿일이지 텃밭에 물주고 뜰 가꾸는 정도 아닐까? 평생 책상머리에서 글줄 읽으며 살던 선비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농삿일을 어떻게 하겠어? 혹시 베스트셀러를 쓰기 위한 농촌 체험인가?
새벽길을 달려 2시간여-.미시령 넘어 웅자한 울산바위를 뒤로하고 닿은 곳 고성군 토성면.30여 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 산기슭에 안 부총리가 살고 있는 농가주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내외가 직접 욕조·변기·벽난로 같은 소품과 인테리어 마감재를 골라 하나 하나 꾸몄다는 집은 그 자체로 ‘갤러리’입니다. 벽을 두지 않아 단절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흐르듯이 꾸민 실내 구조에, 높이 솟은 천장 한가운데를 유리창으로 덮어 채광 효과를 더했습니다. 굳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거실에서 변화무쌍한 하늘시계의 움직임과 절기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말이죠.
집의 바깥 둘레로는 철따라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과 나무들, 과실수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에라도 온 듯 황홀경에 빠지게 합니다. 안 부총리의 ‘일터’인 300여 평의 텃밭은 그 앞뜰 너머에 펼쳐져 있더군요.
‘새벽 4시쯤 기상→밭에 나가 풀 뽑고 거름주기→식사를 겸한 휴식 혹은 낮잠→다시 밭일→샤워후 독서와 글쓰기. 단조로운 일상. 유일한 씨름 상대는 잡초. 농사가 끝나는 늦가을부터 봄까지는 책읽기와 사색, 글쓰기로 소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에 만족하던 옛 선비의 모습이 이랬을까요. 안 부총리의 설명입니다.
“풀을 뽑는 건 단순한 육체노동인데 그 속에서 오히려 생각이 명징해지고 지적 자극을 더 강하게 느껴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들을 짬짬이 메모해뒀다가 나중에 다시 꺼내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죠.…나름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싶지만 서울 살 땐 늘 허덕이며 살았던 것 같아요. 원치 않아도 체면 때문에, 관계 때문에 나가야 하는 모임들, 결혼식등 경조사, 동창회, 학회와 포럼 축사, 주례 요청등 지금도 서울에 있다면 아마 똑같이 살 거예요. 내가 주인이 아닌 삶이죠. 은퇴하고 서울을 떠나자고 결심한 건, 이제부터라도 내 삶의 주인으로 살자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지금 비로소 내가 주인으로 사는 삶을 살기 시작했어요. 정말이지 이렇게 사는데 만족합니다.”
내가 주인이 아닌 삶-.사회적 성공이나 직업적 성취를 위해 내달리다 보면 자칫 주체로서의 자아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객체로 전락한 자신을 발견할 때, 인간은 북적대는 도심 한복판에서도 절대 고독을 느낍니다. 사람들 무리에 뒤섞여 있어도 단절과 소외감을 느끼고 삶이 몸에 맞지 않는 거추장스런 옷처럼 느껴지는 지독한 내면의 고독 말입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월든 호수가 숲속 통나무집에서 자급자족 생활을 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에 열광하는 건 현대 도시인들이 느끼는 고독의 투영입니다.”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다“는 그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강원도 고성의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농가주택 앞뜰
이번 주 중앙SUNDAY는 어렵게 성사된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의 인터뷰를 독점 게재합니다. 김동률 서강대 MOT 교수가 진행한 인터뷰가, 오랜 도시 생활에 진력난 분들에게 향긋한 청량제가 됐으면 합니다.
이밖에『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심층 인터뷰,20대 국회 당선자들이 생각하는 20대 국회상과 바람직한 권력구조·선거 제도,『거대한 변환』의 저자 칼 폴라니연구소의 마가렛 멘델이 말하는 ‘지금 왜 사회적 경제인가’등 푸짐한 읽을거리들이 독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이정민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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