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교육/7. 초등교육

[스크랩] Art helper 첫 날_‘손을 잡고 이끌어주는 교육’

양선재 2015. 9. 2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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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크레존 담당자
  • 등록일2015.09.24
  • 조회수187

(14) Art helper 첫 날_‘손을 잡고 이끌어주는 교육’

 

 

연구년으로 이곳에 있는 시간만큼이라도 가급적 열심히 교육현장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나는 이곳 엄마들처럼 학교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다. 한 주에 한 번 목요일마다 미술 수업시간에 ‘미술 도우미 art helper’를 하는 일이었다. 미술 담당선생님을 보조하여 아이들을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척하면 말을 알아듣는 대학생들이랑 내가 하고 싶은 수업을 마음껏 해 오다가, 과연 이 어린 초등학생들을(그것도 타국의) 잘 도와줄 수 있을지 잠깐 두려웠으나, 그냥 부딪쳐 보기로 했다.
조금 일찍 도착하니 담당 선생님이신 Mrs. Sundell이 앉아서 오늘 할 수업의 샘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소탈해 보이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초현실주의를 전공했다고 했더니 아주 반가워하며 자신이 보았던 독특했던 전시들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본인의 딸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박물관 큐레이터라는 얘기도 했다. 쓱쓱 슈퍼맨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해가면서 이 모든 얘기들을 힘들이지 않고 한다는 게 신기했다(그림 잘 그리는 사람 정말 부럽다). 테이블은 알록달록 재미있는 그림들로 가득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이 들어왔다. 나를 본 적이 있는 딸의 친구 소피아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크리스티나는 달려와서 나에게 와락 안겼다(크리스티나 엄마는 어쩜 아이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키웠지?). 딸은 티 안 나게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샘플 그림들이 놓여 있는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 그림 저 그림을 관찰하는 사이 선델 선생님이 오늘 수업의 주제를 설명해주었다. “A healthy me is drug free!”라는 주제로 티셔츠 디자인을 하는 거였다. 산타 바바라 뮤지엄 아트캠프를 취재할 때 그곳 아트 교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선델 선생님도 활동을 하기에 앞서 샘플 자료를 충분히 보여주면서 아이들로 하여금 다양하고 풍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워밍업의 시간을 주었다. 본인이 그린 샘플뿐 아니라 이전 학생의 작품들도 보여주면서 유머 있는 설명을 덧붙였다. “45분 동안 고민하느라 사선만 그은 학생도 있어요” 라고 하자 아이들이 모두 하하하 웃었다. 시간 컨트롤을 잘 하라고 주의사항을 따로 하지 않았다. 파워포인트나 자료사진에 실린 샘플보다는 이렇게 교사가 직접 제작을 하거나 이전 학생들의 작품 실물을 보여주는 게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사진1_다양한 샘플 그림들

[사진1. 다양한 샘플 그림들]

 

“이렇게 그린 그림은 어떤 것 같아요?”
“별로인 것 같아요. 너무 지저분하게 그렸어요.”
아이들은 이 그림 저 그림을 보면서 눈치 보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발표했다. 아이들의 일상에서 수업의 주제를 연결시키는 부분도 좋아 보였다.
“여러분 티셔츠를 보세요. 재미있는 캐릭터가 그려진 친구 있나요? 건강함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티셔츠는 무엇인가요?”
하트가 그려진 티셔츠, 공룡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아이가 자기 티셔츠를 자랑했다. 즐겁게 워밍업의 시간을 가진 후 선델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오늘 활동의 가이드라인을 주었다. 자로 사각형의 프레임을 만들고 그 안에 마음껏 주제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으면 되는데, 기하학적인 무늬를 원하면 컵 뒷부분 등을 활용해 동그라미를 그려도 된다고 설명하였다. 

 

 

“캐치플레이즈가 함께 들어가면 더 좋겠지요. 연필, 크레파스, 물감, 워터펜 등 재료가 많으니 원하는 재료를 마음껏 써보세요. 자 자리에 앉아 시작해 볼까요?”
많은 예시자료를 보았지만 그걸 그대로 따라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다들 각자 그리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 눈치였다. 물론 별로 힘들이지 않고 금방 쓱쓱 그리는 아이도 있고, 한참 생각에 빠져 아무 것도 시작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거 어때?”하고 자기 그림에 대해 친구에게 의견을 구하는 아이도 있고, 아예 남의 자리까지 옮겨 가서 “여기에 나비를 하나 그려 넣으면 진짜 멋질 것 같아”하며 진지한 조언을 건네는 아이도 있었다. 즐겁고 자유분방했지만 그러나 자신들의 방식으로 주제에 열심히 집중하고들 있었다.

 

 

사진2_디자인 수업 풍경

[사진2. 디자인 수업 풍경 ]

 

흥미로운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에게 각자의 요구에 맞게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점이었다.
“선생님, 펭귄을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 아이가 도움을 요청하자 선생님이 자료를 뒤적뒤적 하더니 펭귄 사진을 찾아주었다. 그리고 먹지를 주면서 틀을 따라 그대로 연필로 그리면 베껴 질테니 그런 다음 더 정교하게 네 스스로 그 위에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놀라운 것은 “우유곽을 어떻게 그려야 될지 모르겠어요”하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취한 행동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그리면 되지”하면서 아이의 그림 위에다 직접 연필로 우유곽을 그려주는 거였다. 양쪽으로 얼굴 프레임 두 개를 그리고 왼쪽에는 건강하지 못한 얼굴, 오른쪽에는 건강한 얼굴을 그리려고 계획을 세운 소피아가 “선생님, 마약을 먹은 얼굴을 어떻게 그리면 될까요?” 물었다. 그랬더니 연필을 들고 다가온 선델 선생님은 역시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직접 완전 망가진 얼굴을 쓱쓱쓱 그려줬다. “자 됐지? 그럼 건강한 얼굴 쪽은 네가 그리렴. 눈썹도 예쁘게 올라가고 미소가 가득한 그런 얼굴을 그리면 어떨까?”하였다.
이걸 보면서 순간 많은 우려의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저렇게 선생님이 직접 그려줘도 되는 거야. 애들 스스로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직접적인 도움이 아니라 간접적인 도움을 주셔야 더 교육적일 텐데. 그리고 누구는 그려주고 누구는 안 그려주면 공평한 거야? 평가는 어떻게 하려고 저러시지?’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선생님, 자로 직선이 잘 안 그어지고 삐뚤삐뚤 그어져요.” 또 다른 아이가 도움을 요청했다.
“예원이 엄마한테 부탁하렴” 선델 선생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도우미의 본분을 망각하면 안 되지.
이 아이가 어찌나 기대에 찬 눈빛으로 초롱초롱하게 나를 바라보는지 (몇 십년 만에 자로 선을 긋는 거라 떨렸지만) 의연한 표정으로 “1cm 정도의 간격을 띄고 자로 그어보면 어떨까? 괜찮을 것 같니?”하면서 사방에 선을 좍좍 그어주었다. 다행히 만족했는지 “thanks”하고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나도 간접적인 도움이 아닌 직접적인 도움을 준 셈이었다.

 

선 그어주기를 포함해서 45분 수업동안 내가 한 역할은 딱 세 가지였다. 1. 아이들에게 자 나눠주기. 2. 선 그어주기. 3. (가장 난이도가 높았던) 작두로 종이 잘라주기. 3번은 어떤 남자 아이가 끝 부분을 망쳤다며 그 부분만 저기 있는 작두로 잘라달라고 부탁한 일이었다. 작두질은 처음 해보는 거라 잘못 잘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나 이거 처음해보니까 다른 종이로 먼저 시험해보자”라고 말했더니 “Okay”하는 그 아이의 얼굴에 약간 긴장한 빛이 돌았다. 시험용 종이가 잘 잘리는 걸 확인한 후, 심혈을 기울여 종이를 똑바로 놓고 별 탈 없이 잘라주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신뢰가 가는 helper의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45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흘러가고,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을 따라 점심을 먹으러 떠났다.
“아이들이 모두 열심히 멋지고 개성 있는 작품들을 만드네요.”
미술 선생님에게 말을 건넸다.
“살살 부추기고 격려해주니까 애들이 엄청나게 집중하죠?” 선델 선생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우리의 경우 예술교육에서 상상력이나 창의성을 생각할 때 ‘남이 하지 않은 고유한 나만의 생각’이라는 점에 큰 비중을 두게 된다. 그런데 사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무수한 많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된 결과물들을 접하면서 나의 생각도 자란다. 이 시대의 많은 창의적인 작업들은 협업에 의해 생겨나고, 오픈소스나 카피레프트처럼 자신의 창의적 산물을 공개하여 함께 발전시켜나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본다면 미술 시간에 아이들에게 ‘어쨌든 너희 힘으로 해봐’라고 말하며 막막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 보다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생각을 잘 발전시킬 수 있도록 그들의 손을 적극적으로 잡아주고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가의 관점에서 수업을 설계한다면 공정성이 가장 큰 관건이 된다. 모든 아이들에게 동일한 정보와 자료, 동일한 도움을 줘야 공정한 평가를 할 수가 있다. 또한 결과물의 완성도가 매우 중요한 평가의 잣대가 된다. 그런데 배움의 관점으로 방향을 돌려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신이 완수해야 할 어떤 프로젝트가 주어졌을 때, 1. 그와 관련된 기존의 성과물들이 어떤 것들이 있나 살펴보면서 아이디어를 넓히는 것. 2. 자신이 그 안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 3. 표현하기 위해 문제에 부딪쳤을 때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 4.이를 토대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물을 완성하는 것. 전문가들이 창의적인 작업을 완수할 때 해나가는 과정을 이 아이들은 정확히 경험하고 실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적극적으로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선델 선생님의 교육 방법에 공감이 갔다.

 

 

수업 자원봉사를 했지만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게 훨씬 더 많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선델 선생님이 마음이 쓰였는지 내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오늘은 첫 날이라 별로 하실 일이 없었지만 늘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음에는 분명히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조윤경 (이화여대 교수, UCSB 교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