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20.8.20. 목. 23면
사설.칼럼칼럼[세상 읽기] 어느 시골 학교 교장의 ‘시간’ 교육론 / 이병곤
등록 :2020-08-19 17:37수정 :2020-08-20 02:42
이병곤 ㅣ 제천간디학교 교장
우리 학생들은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지 않는다. 중고교 통합 6년제 기숙형 비인가 학교다. 충북 제천시 최남단 산골에서 106명의 학생과 스무명 남짓한 교사들이 살아간다. 시험 압박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 그 자체가 내겐 참여관찰 교육연구나 다름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학입시는 참된 교육을 방해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같다. 단칼에 자르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손가락으로 풀어내기에 너무 복잡하므로.아이들이 시험에 매이지 않을 때 학교로 첫번째 찾아오는 손님은 풍족한 시간이다. 고3 아이들은 스스로 정한 기관이나 단체로 1학기 내내 인턴십을 나간다. 동물권 보호, 여성운동, 지역자치, 청년 공동체, 문화 기획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어렵게 구한 인턴십 장소인 만큼 아이들은 출퇴근, 허드렛일, 개인 프로젝트 몰입에 열성이다. 학교 밖에 있는 멘토, 즉 사람이 지닌 전문성을 통해 세상을 보고, 관계 맺음의 어려움 속에서 업무를 익힌다. 담장을 넘나든 아이들은 넉 달 만에 속이 한 뼘씩은 깊어져서 돌아온다. 학교를 떠나봐야 비로소 ‘공부’를 완성하는 역설이 성립하는 순간이다.두번째 손님은 자유다. 나를 포함하여 한국 기성세대는 자유를 무시하거나, 모르거나, 두려워하거나, 쓸데없는 것이라 여겨서 곁으로 밀쳐둔다. 여러분은 당당하고, 호기심 넘치며, 겸손한 듯 당돌한 청소년들의 눈빛을 본 적 있는가? 나는 매일 보면서 산다. 교사들이 많이 가르쳐서 그런 게 아니다. 정반대다. 그들에게 시간을 많이 줬다. 시간이라는 동전의 뒷면이 곧 자유다. 그것을 선물받은 아이들의 첫 증상은 헤맴이다. 그러다 곧 균형을 찾는다. 책이나 동아리, 음악이나 자연 등 주변 세계로 몰입할 오솔길이 아이 앞에 나타난다.세번째 손님은 관계다. 친구들과 형제자매 사이의 우애를 느낄 정도로 깊이 사귄다. 물론 그 와중에 심리적 상처가 깊게 파일 때도 있다. 청소년기 6년 세월, 길다. 그사이 아이들은 무수한 동굴과 굽은 길을 지나면서 타자와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 공존하는지 깨달아간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익히는 일은 대패질 같다. 반듯하게 잘 갈린 날을 가지고 나무의 결을 살리도록 힘 조절하여 당겨야 한다. 얄팍한 언어만 믿고 하룻밤 만에 배울 일이 아니다. 삼강오륜은 모두 ‘인간관계’에 대한 옛사람들의 윤리의식을 강령으로 표시한 것 아니던가. 도덕 감정은 어려움 가운데 숙성 시간이 지나야 성숙한다.네번째 손님은 균형 잡힌 인성이다. 독일어 ‘빌둥’(Bildung)이 여기에 해당한다. 철학과 교육이 개인의 태도에 녹아들어서 총체적인 자기다움을 유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를 이렇게 키웠다면 그 사람은 최고의 교사다. ‘됨’의 문제를 해결하기란 그처럼 어렵다. 조직 생활을 해본 사람은 안다. 동료의 인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회사가 능력 때문에 당신을 고용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의 인성 때문에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외치고 싶을 때가 어디 한두번인가.시간을 누리면서 자유롭게 성숙하며, 평화로운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사람은 행복감을 느낀다. 지성과 덕성의 탁월함을 갖추어 윤리적 인간(=시민)으로 살아간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다. 교사들 능력이 출중하거나 부지런해서 그런 게 아니다. 무의미한 경쟁 교육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렇게 해보라고 우리 교육부에 2020년 한해에만 72조원의 교육예산을 아낌없이 내준 거다.학교 조직은 민족국가 형성기의 유산이었다. 이것은 세계 공통이다. 공장이 그랬던 것처럼 학교 역시 시간과 공간을 놀랄 만큼 효율적으로 구획했다. 학생들이 그나마 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곳에 ‘친구’와 ‘점심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교육혁신을 하고 싶은가? 그들에게 점심시간만 주지 말고, 선심 써서 그냥 시간을 내어주시라. 정밀한 운영 시스템 관리자들, 그대들은 잠시 뒤로 빠지시라. 입시제도 폐기가 곧 교육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 그거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돈도 들지 않는다. 시도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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