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갈퉁 선생님과 한시간의 전화 인터뷰를 했다. 밝은누리 참여자들도 홍천과 인수마을에 흩어져 있었고, 계획했던 인터넷 화상 통화는 그런 기술들이 늘 그렇듯 막상 중요한 상황에선 잘 안되어서 긴장된 시작이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전화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굳이 먼 나라에 계신 이 분을 만나려 했던 이유는, 한반도 평화의 방법으로 중립화를 오래전부터 제안했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요한 갈퉁 선생님은 노르웨이 출신의 평화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이다. 어렸을 때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아버지가 나치에게 붙잡혀 가고 이후에 본인은 양심적 병역 거부로 감옥에 가기도 했다. 1959년 오슬로에 <세계평화연구소>를 세웠고, 1964년 평화연구학술지 The Journal of Peace Research를 창간했으며, <세계평화학회>를 발족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셨다. 흔히 현대 평화학의 아버지 또는 창시자로 불리는 배경이다. 교수님은 "학자들은 책과 현실을 종종 혼동한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평화학이 분석뿐에 그치는 것이 문제이며 학문이 현실문제의 해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본인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약 150개의 갈등과 분쟁을 중재하셨고, 지금도 계속 그런 일을 하고 계신다.
늘 분쟁이 최악에 이르러 당사자들간에 해결이 불가능할 때에 중재를 요청받는 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창의적인 접근'을 중요하게 언급하신다. 1986년에 쓰신 글에는 2000년 이후에나 한국 분단체제의 변화가 있겠다고 예측하셨는데, 그 이유는 한국 사회 내부적으로 상상력이 질식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렇기에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가 생겨나야 가능할 것이라 보신 것이다. 30년도 지난 글이지만, 지금의 상황에도 머금어 볼만한 제안을 담고 있다.
"한국의 중립국화는 가능할 뿐 아니라, 매력적인 방식이다. 한국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 지역과 세계 전체를 위해서도 그러하다. 중립화의 과정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한반도 뿐 아니라 세계를 위협하는 주요 분쟁의 원천적인 해소이다.”
유럽에서 중립화의 다섯개의 모델을 제시하는데, 스위스,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스웨덴 그리고 핀란드이다. 각각의 특징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중 스위스가 흥미롭다. "스위스라는 자기 방어를 위한 군대를 보유하면서 중립을 지키는 것도 배울 수 있겠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작은 중립국에서 갈등 관계에 있는 주변 강국들이 만나 평화를 논의하는 것이다. 정상회담을 하고 컨퍼런스를 한다. 한반도도 세계의 문제에 있어 이러한 중요한 임무가 있다. 판문점이 아시아의 제네바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또한 평화체제는 국가 외부적인 문제 뿐 아니라 내부 정치 체제의 변화도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면서, 스위스의 경우 강력한 지역 공동체 자치를 바탕으로 중립화가 가능할 수 있었음을 언급하였다.
교수님과의 인터뷰 하였던 내용을 함께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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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누리] 조선이 원하는 것은 세가지이다. 첫째, 정전협정을 평화 조약으로 바꾸는 것. 둘째, 외교 관계의 정상화. 셋째, 한반도의 비핵화이다. 미국은 아직 수용하지 않고 있고, 한일관계는 악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갈퉁] 김정은의 주장은 확고하다. 문제는 주변국가들의 반응이다. 첫째 문제는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한 미군의 지속적인 주둔을 원한다는 점이다. 둘째 문제는 비핵화 사찰방식에 대해 합의가 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조선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만이 아닌 한/조선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원하고 UN의 감독하에 절차가 진행되길 바란다. 둘째, 궁극적으로 미군이 철수하고, 유엔평화유지군에 의한 안보체제로 대체하길 원한다. 셋째, 외교 정상화를 바라고 있는데, 그 맥락에선 1951년-1953년 간 일어난 한국전쟁의 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바로, 이 전쟁에 대한 휴전을 멈추고, 평화체제를 선포하는 것이 바로 외교 정상화의 첫걸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 평화체제에 있어 중립국화와 비핵화의 내용은 포함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Korean Peninsula (한/조선반도)라는 용어는 앞으로 더욱 자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제주에서 부터 백두 전체를 어우를 수 있는 용어로, 그 누구에게도 거리낌없이 사용될수 있는 소중한 말이다.
[밝은누리] 선생님은 조선의 요구가 합리적이라고 보시는 건가?
[갈퉁] 그렇다. 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의 요구는 합리적이고 그리고 향후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본다. 조선이 그간 외교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고 있지만, 주요 이해당사자가가 될 러시아,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그들과 관계가 비교적 원만하다. 이에 비해, 미국은 거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멀리 있어왔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는 현재 개선되고 있다.)
밝은누리] 무장 중립국도 있고, 비무장 중립국도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적극적평화”(positive peace)의 개념에 비취어 보아도 궁극적으로는 비무장 중립국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가?
[갈퉁] 내 입장은 이렇다. 평화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 (비무장 중립국화를 이루어가라.) 그 방식은 조선과 남한이 공동의 과업을 갖는 것이다. DMZ가 그러한 사례가 될 수 있다. 나는 DMZ가 확장될 수 있고,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이 강하긴 하지만, 이제 철수할 때가 다가온다고 본다. 일본 전 수상 중 한사람도 분명히 그런 예측을 하였다. 조선의 입장은 명확하다. 비핵화를 하고 사찰을 받겠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걸 스스로 달갑게 하겠는가? 그러나, 조선은 거듭 사찰을 받겠다고 하였고, 전체 한반도가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밝은누리] 선생님은 창의적 접근을 강조하셨지만, 한국사회는 분단체제로 인해 많은 왜곡이 있다. 남북 문제에 관해서는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토론이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비무장이나 중립을 건설적으로 토론하고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떻게 창의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겠는가?
[갈퉁]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반도 분단, 맞서는 동맹 체제 뿐 아니라 남한의 동서 갈등도 심각하다. 어쩌면 남남 갈등이 남북 갈등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존중하자. 하지만 한국인들은 매우 슬기롭다. 강대국들을 이웃으로 두고 지금껏 헤쳐온 역사가 증명한다.
주변 열강의 존재 때문에 문제 해결이 까다롭다. 김정은은 사실 예측가능하고 직설적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 공습 의해서 평양에서 300만명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극복하기 어려운 트라우마이다. 그래서 미국의 공격을 대비해 서울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점령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시도가 있었으리라 믿었을 텐데, 실행되지 못한 이유이다. 하지만 어쨌든 북한의 이런 전략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밝은누리] 평화체제의 전환은 정치인들의 합의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의 문제를 정상간의 합의에 맡겨놓고, 시민사회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은 적극적평화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지난 2년간 매달 기도순례를 하는 이유도 적극적 평화를 이루는 근본적인 힘은 시민들의 연대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서였다.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위해서 시민들이 반드시 해야할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갈퉁] 방금 한 말 모두 공감한다.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원탁회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원탁 토론 자리를 마련해서 한반도의 각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논의한다면 매우 풍성한 논의가 될 것이다. 아마도 지금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공감과 합의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는 주로 갈등과 차이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제주에서 백두까지의 한반도 전체에 대한 관점에서 논의해야 한다.
[밝은누리] 사실 그런 이유로 8월에 그러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갈퉁] 정치인들이 답을 가지고 있을거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고, 이 문제의 복합적인 측면 때문에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다. 그들이 목소리가 클지는 몰라도 공감을 이루고 있지는 못하다. 즉, 원탁회의를 마련한다면 정치인들이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밝은누리] 지역 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스위스의 모델을 예로 들면서 강력한 지역 공동체의 자치를 통해서 중립국 체제가 가능했다고 하셨다. 이전 선생님 강의를 보니, 왜 영국이나 미국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모델은 상상하지 못하는가. 스위스식 모델은 어떤가.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우리 밝은누리에서는 마을 공동체를 회복하는 운동을 30년간 해오고 있다. 한국은 마을 공동체의 전통이 있었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붕괴되고 파편화된 개인만 남았다. 평화체제의 한반도, 동북아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서 마을 공동체가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갈퉁] 무척 흥미롭다. 지역 공동체는 매우 중요하다. 비무장 지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 공동체간의 연대가 무척 중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지역 공동체 간에 서로 연대하고 사람을 보내고 하는 것.. 매우 중요하다. 질문 속에 중요한 포인트가 이미 담겨 있다. 공동체는 개인보다 강하다. 하지만 개인 또한 필요하다. 의사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 어쨌든, 공동체에 대한 주목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밝은누리] 밝은누리는 국경, 종교,인종, 이데올로기를 모두 넘어 동북아시아의 지속가능한 평화 구축을 목적으로 넓은 연대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선생님과, 선생님께서 만드신 Transcend 와 향후 협력하고 싶고, 우리의 운동에도 초대하고 싶다.
[갈퉁] 우리는 지금 이순간 같이 일하고 있는 것이다. 트렌센드(Transcend)의 설립자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명목상 다른 운동에 참여 하기는 쉽지 않다. 트렌센드는 나름의 방법으로 평화를 위한 중재역할및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가 여태껏 일구어 온것이 많지만, 여전히 할 몫이 더 많다.
우리는 이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로 서로 협력하고 있다. 나는 어떤 대화나 질문에 열려 있고, 내가 할수 있는한 최대한 대답해 주겠다. 이제 곧 89세가 되면서 얻은 하나의 장점은 지난 수십년간의 경험, 그리고 나의 아버지로 부터 전해진 경험의 축적으로 생긴 지혜이다.
유럽에서 얻은 중요한 경험을 나누었으면 한다. 평화의 과정은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을 필요로 한다. 한 세대가 지나서야 비로서 평화를 논할수 있는 대화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논하고 있는 것들은 사실상 2050년, 즉 지금으로부터 30년, 바로 한세대 이후의 시점을 염두하고 한 작업해야 한다. 이렇게 복잡한 절차들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펼쳐진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단어이다.
사람의 DNA가 잉태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펼쳐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인간 존재(Human being)라는 말보다는 인간 되어감 (Human becoming)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물꼬가 트이는 것을 긴호흡으로 준비하고 지켜봐야 한다. 앞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과 운동을 잘 펼쳐나가며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소식을 알리며 연대를 이루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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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간 가까이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평화학이라는 한 분야를 개척한 대가이고 나이가 내년이면 아흔살이 되시지만, 이렇게 열려있는 자세로 먼 곳에 있는 젊은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태도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인터뷰 후에 주고 받은 이메일에서도 언제든 필요하면 또 이야기 나누자고 말씀하셨다. 적극적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당신의 가르침을 이렇게 일상에서도 실천하시고 계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