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 (김호준 지음, 주류성 출판사, 2013)
고운이들 연구모둠_선아, 경선, 냇가미정, 달진영
제 1 장 고려인과 연해주
1. 고려인은 누구인가?
⦁ 이주 초부터 “고려인” 자처
- 구소련에 거주하던 우리 한인들의 선조는 조선왕조에서 러시아로 자진해서 이주한 사람들. 그 후예들은 스스로를 ‘조선 사람’ 또는 ‘고려 사람’이라고 부름. 1860년대 이미 ‘고구려 사람’ 또는 ‘고려 사람’으로 칭했음.
-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이 연해주가 고구려의 땅이었음을 과시하기 위함으로 추정
- 그들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 연해주에서 ‘고려’, ‘고려인’은 그들의 역사성과 민족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용어처럼 사용. 특히 볼셰비키 10월 혁명 직후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 존재를 알릴 필요성이 있을 때 사용.
- 192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작가 조명희가 연해주 한글신문 ‘선봉’에 발표한 ‘짓밟힌 고려’ 라는 항일 산문시가 ‘고려인’ 용어 사용의 효시가 됨.
- 1937년 강제이주 후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 고려인을 지칭하는 러시아어 ‘카레이츠’는 고려사람. 그러나 소련이 북한지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한 이후 ‘조선’이 ‘고려’라는 용어를 대신. 6.25동란이후 더욱 고착.
-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남쪽의 한국인과 만났지만, 자신들을 ‘한국사람’으로 호칭하는 것을 껄끄러워 함. 자신들을 ‘조선사람’ 이나 ‘한국사람’과 구별해야할 필요성 느낌.
- 1991년 이후 혼용하던 자신들의 호칭을 ‘고려 사람’으로 통일.
-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민(棄民)의 역사. 조선 땅에서 살수 없어 연해주로 이주한 유민(流民), 나라를 잃고 벌판을 떠돌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20세기 디아스포라1) .
2. 연해주는 고려인의 고향
- 연해주 : 동해로 빠지는 두만강의 하구 17km를 사이에 두고 우리 한반도와 이웃하면서 아무르 강을 북쪽 경계로 하여 서쪽의 우수리 강과 동쪽으로 동해 연안 사이에 위치한 땅. 바다에 연해 있다는 뜻. 행정구역상 주가 아닌 변강(邊彊). 연해변강이 맞다. 행정수도는 블라디보스토크.
- 연해주 포함한 러시아 최동부를 ‘원동’ 또는 ‘극동’으로 부름. 중국에 속해있었으나, 아이훈조약(1858), 베이징조약(1860)에 의해 러시아로 넘어감.
- 연해주는 우리 한민족의 생활권이었다. 부여, 북옥저 족이 거주한 지역, 그 후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하에 장기간 우리 민족 문화가 꽃피운 영역. 주몽의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에서, 북쪽으로 송화강, 서쪽으로 랴오둥 반도, 동쪽으로 연해주를 통치.
- 926년 발해 멸망 후 우리 민족의 손에서 벗어나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중국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면서 우리에겐 고토(故土)로서의 의미만 지니게 됨.
- 발해 멸망 이후 연해주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고, 17세기 초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명나라 정복하고 청나라 건국하면서 이 지역을 자기 선조의 발상지라고 신성시하여 봉금령을 공포하고 한인의 이주를 금지함.
- 연해주 최남단에 위치한 크라스노예 셀로는 조선의 옛 영토인 녹둔도(鹿屯島): 이순신 장군이 조산만호로 가서 여진을 토벌하고 둔전제를 실시하던 곳. 조선은 1899년 청국과 러시아 간의 국경 재조정 때 녹둔도 반환교섭을 의뢰, 러시아와 국교를 맺은 뒤에도 녹둔도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무위에 그침.
- 한국이 러시아와 최초로 접촉한 것은 17세기 중반. 당시 청나라는 동진하는 러시아를 공격하고자 조선에게 조총부대의 파병을 요청. 이에 효종은 1654년, 1658년 양차에 걸쳐 군사를 파병하여 러시아군을 물리침. 이것이 나선정벌. ‘나선’은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
- 철종 5년(1854. 4월) 러시아 해군 중장 푸티아틴이 함대를 끌고 동해안에 들어와 항로를 열기 위한 작업 중 발포하여 영흥만의 내항인 송전포의 양민을 죽이는 사건. 러시아의 극동 출현을 예고한 사건. 송전포를 라자레프 항이라 명명. 러시아는 1858년 청나라와의 아이훈조약으로 흑룡강 이북(아무르주)을 확보한데 이어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지역에 진출. 우리와 두만강 경계로 국경을 접하게 됨.
- 연해주 개척은 조선 후기 이래 한반도에서 이주해간 조선인들, 즉 고려인이 선도. 벼농사를 시작, 농업기술과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항일독립운동의 무대가 됨. 함께 한 고려인 수는 10만 여명. 1937년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중아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며 연해주에서 쌓아올린 70여 년간 가꾼 삶을 잃어버림. 국제적으로 볼 때 연해주는 남북한과 미· 일· 중· 러 등 4강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역.
- 러시아 정부는 한국의 연해주 진출에 우호적/ 경제, 사회적 기반을 닦으면 통일 이후 한국인을 필두로 연해주 고려인, 중국 연변의 조선족, 북한지역의 조선 사람까지 모두 아우르는 한민족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음. 현재 연해주에는 같은 핏줄이면서도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다른 고려인, 중국 조선족, 남북한 주민이 공존.
- 고려인의 세 부류
* 소련 해체 이전부터 터전을 잡아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는 토박이,
* 소련 해체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재 이주해온 ‘큰땅치’
* 2차 대전 후 사할린에서 이주해 온 ‘화태치’
제 2 장 연해주 개척시대
1. 두만강 건너 신천지로
- 연해주는 19세기 중엽까지 청의 봉금령으로 인해 미개척지로, 소수의 만주족, 토착 유목민인 타지족과 오로치족이 거주.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주는 19세기 초부터 산발적으로 이루어짐. 당시 함경도 거주 조선인들은 육로나 해로를 이용해 연해주 왕래.
- 1811년 ‘홍경래의 난’ 직후 두만강 건너 박석골, 감자 밭골 등에 거주함.
⦁ 1860년대 정착 시작
- 굶주린 함경도 조선인들은 두만강을 건너 넒은 땅 연해주로 감. 많은 수확과 기근의 탈피, 봉건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약속한 희망의 땅. 그들은 영고탑, 훈춘 , 쌍성자(우수리스크)로 통하는 옛길을 따라 땅을 차지하고 부락을 형성.
* 조선인의 연해주 이주 원년에 대한 설
1. 지신허에 최초로 고려인 마을이 들어선 1863년 설 (필자가 지지하는 설)
2. 제정러시아정부는 이주 허가를 공식으로 내준 1864년 설
3.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따르면 1853년 북관(함경북도)사람 한일가가 포시예트 지방에 왕래하며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연해주 이주의 효시로 기술.
4. 1860년 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도헌 김학만 등이 1902년에 낸 청원에서 기술.
- 러시아 측 기록은 1860년부터 조선인들이 가축을 끌고 와서 초소에 팔았으며, 1863년 초소에서 가까운 곳에 초가집 몇 채를 지어 정착한 정황 있었고, 1864년 조선인 14가구 60명에게 이주허가를 내주고 씨앗과 식량을 지원.
* 연해주 고려인의 역사기록인 ‘아령실기’ : 1864년 봄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몰래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비노그라드노예)에 와서 개간에 착수한 것이 효시.
- 조선의 빈곤, 기아, 억압을 피해 목숨을 걸고 연해주로 이동. 농민이 대다수. 1867년 12월에 경흥군 두 마을 전체(150가구)가 얀치헤(크라스키노) 마을로 이주. 당국 허가 받지 않은 불법이주.
- 1869년 북한 지역에 대흉년이 들어 함경도 육진지방의 농민들이 북간도와 연해주로 대거 이동. 6월부터 12월까지 조선인 6,500명이 이주함. 조선에서는 불법 월경으로 추방당한 사람들을 장터에 모아 공개 효수(梟首)하는 게 관례였음. 1884년에 남석동이 개척. 이해 6월 경흥 개시 조약으로 금강이 해제되어 연해주로의 이주가 자유로워짐. 1904년 연해주의 고려인 촌은 32개.
⦁ 일 찾아 매년 수천 명 유입
- 고려인 이주민 증가를 바라보는 러시아의 시각 : 고려인의 노동력을 적극 활용하여 원동 지역을 개척하려는 긍정적 측면, 부정적 측면은 원동지역의 안보에 고려인들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
- 동시베리아 총독 코르사코프 : 해안선과 국경지대에 고려인이 정착하는 것을 금지.
- 코르사코프의 후임 시넬리코프 : 연해주 고려인들을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의 아무르 지방으로 분산 이주시키는 사업 진행.
- 1871년 7월 말, 고려인 남녀 102가구 431명이 바지선과 기선에 실려 하바롭스크 서쪽 아무르 강의 지류인 사마르카 강변으로 이송. 도중에 3명 사망 , 43명 질병, 23명 만주로 이탈, 8월초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은 모두 362명.
- 러시아당국은 이들에게 겨울옷, 목조주택, 흙벽집, 학교건물, 공동 목욕탕 등을 지어 제공. 식량과 종자도 공급. 고려인들은 땅 임차. 아무르의 첫 고려인 정착촌 블라고슬로벤노예(축복) 탄생. 고려인들은 러시아 정교로 개종, 귀화함. 넓고 비옥한 평야로 유족한 마을로 성장. 고려인들의 선망의 땅.
- 1870년대 이후 조선에서 돈벌이를 찾아 연해주를 찾는 계절노동자들 증가. 매년 1500명, 미역 채취위해 최대 500명 몰림. 1880년대 초 3,000명에 달함. 1882년 연해주에는 러시아인(8,385명)보다 고려인(10,137명)이 더 많이 살았음. 연해주 이주가 시작된 첫 20년간 러시아당국은 고려인들의 근면성과 성실성에 큰 호감. 고려인들을 우수리 지방의 초기 개척에 이용. 교통 통신수단 건설과 군수물자 수송에서 고려인 노동력을 광범위하게 이용. 고려인이 연해주 지역의 최초 개척자인 셈.
2. 고려인 3부류로 나눠 차별 :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1884년 국교 수립.
- 1888년 조-아육로통상장정이 발효. 육로통행 자유로워짐. 조선인 월경도 합법화. 국교수립 이전 이주한 고려인들은 러시아 국적자로, 이후는 조선 국적자로 규정. 1891년 연흑룡주 총독 코르프는 고려인 이주민 법적 지위를 3개 부류로 구분해 고려인 이주에 대해 규제 시작.
⦁ 1부류 : 국교수립 이전에 이주한 사람. 러시아 국적 부여, 가구당 15데샤티나(약 4만 9,000여 평) 토지 분배. 조세, 노역, 군역의 의무 이행, 상투와 댕기를 자르도록 함.
⦁ 2부류 : 국교 수립 이후 이주민. 매년 러시아 비자 발급. 체류기간 만료 2년. 농사 중단하지 않으면 토지 몰수, 3부류로 강등. 부역과 납세의무 이행, 군복무 면제. 양국 정부의 보호 받지 못함, 러시아 관청 통제속에서 농업 노동자나 반소작인으로 지주에 매여 지냄.
⦁ 3부류 : 여권, 비자 없이 불법적으로 들어 온 사람들. 국유지에서 생산 활동 권리 없음. 한 달 이상 체류 시 조선여권 맡기고 1년 체류허가증 발급받음.
- 고려인을 3개 부류로 분류한 것과 관련한 일련의 조치는 1892년부터 가시화. 연해주 당국은 2, 3부류 고려인들 추방. 1896년 두홉스코이 총독이 1부류에 속한 고려인 1500여 가구에 국적 부여, 토지 분배. 2부류 고려인에게도 체류기간 연장, 내륙의 국유지 임차 허용, 하바롭스크 인근과 이만 등 3곳에 새로운 고려인 마을 생성. 1898년 후임 그로데코프 총독은 국적 취득 못한 1부류 고려인 전원 입적시킴. 2부류에게도 입적 허용. 3부류에게는 내륙지방 정착 허용. 두 총독의 우호적 정책으로 고려인 수는 1892년 1만 2,940명에서 1902년 1만 6,140명으로 증가, 주민수도 3만 2,410명 증가.
⦁ 부유한 원호 가난한 여호
- 당시 고려인 중 입적해 토지를 분배받은 귀화인은 ‘원호’, - 고려인의 20-30%, 러시아인처럼 국가기관에 근무, 군대에 복무. 경제적 부와 법적인 지위향상을 배경으로 러시아와 조선에서 출세. 원호촌에는 러시아정교 교회, 접경지인 포시예트 구역과 수이푼 구역에 밀집.
- 토지 소유권 없는 비귀화인은 ‘여호’, - 원호나 러시아인으로부터 토지 빌려 소작하는 소작인, 원호와 차별, 다른 마을에 거주, 원호는 여호를 천대. 여호촌에는 전통적 서당, 미국식 기독교 교회, 블라디보스토크 동쪽의 수찬지방(현 빨치산스크 구역)에 밀집. 떠돌이 품삯노동자는 질등일꾼(철도건설노동자), 아재비(머슴), 또는 외품자리(임금노동자)라고 불림.
⦁ 남도소 도헌에 최재형 임명
- 러시아 당국은 1893년 고려인 자치기관인 남도소에 초대 도헌(면장 도는 읍장)에 최재형 임명. 고려인 최초로 지신허의 러시아 학교에 입학해 문학 공부, 병영에서 통역, 러시아군 상대로 사업을 해 많은 재산 모음. 고려인 마을마다 학교를 설립, 도로 건설에 기여.
3. 20세기 초 정착마을 32개
- 고려인들은 강변 분지를 따라 보통 수십 가구 단위의 작은 규모로 마을 조성해 살았음.
* 수이푼 4개 마을(코르사콥가, 푸칠롭카, 크로우놉카, 시넬니코보)이 가장 부유.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 - 1907년대 말, 밭벼를 심어 성공.
* 포시예트는 러시아 속 조선 : 연해주 고려인의 최대 밀집지, 두만강에서 20km 덜어진 곳. 22개 마을에 거주, 3만여명. 러시아인은 3,400명에 불과. 포시예트는 내부적으로는 고려인들이 자치기능 유지. 조선식 초가집, 한복 입은 고려인, 간판도 조선어, 거리이름도 조선말, 상평통보 통용, 일상문화는 지극히 민족적. 토속신앙 믿음, 학교 교육은 조선어를 사용하는 민족교육. 당시 한반도에서는 일제가 조선의 고유문화를 짓밟고 있던 때, 포시예트에서 조선 문화가 꽃피고 있다는 것에 고려인들은 긍지 느낌.
제 3 장 항일독립운동 기지로
1. 국권회복⦁의병운동 앞장
- 1905년 강압적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 병탄. 국내에서 의병전쟁과 구국계몽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의 ‘망명 이주’가 늘어남. 망국 후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만주의 용정과 함께 항일독립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중심지.
- 러-일 전쟁 발발후인 1904년 여름, 연해주 고려인들은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결성한 의병에 1,000명 규모로 참여. 포시예트에서 최재형이 의병운동 후원.
-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2) 으로 고종 퇴위하자 안중근, 밀사 파견된 이상설, 이위종, 의병장 유인석, 문인 50여명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고려인들은 의병부대를 위해 기부금, 의복, 식량 모으기를 자발적으로 실시하며 의병활동참여.
⦁ 일본군과 1700회 전투 (1907년 8월~ 1908년 12월)
- 일제는 고려인들의 항일투쟁을 러시아당국에 문제제기. 이에 고려인의 반일선동이나 무장부대의 결성을 허락하지 않고, 밀반입된 무기 압수, 지도부의 분열, 원호인 부호들의 반대 등으로 쇠퇴. 이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고무돼 의병활동 활성화.
- 1910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든 의병부대를 하나로 통합한 군사조직 ‘창의회’ 결성.
- 망국 소식 접한 고려인 200여명 신민학교에 모여 ‘성명회’(반일정치단체)결성.
2. 차르와 천황의 틈바귀에서
⦁ 일제는 “독립운동 저지” 압력
- 조선 강점 이후 일제는 한일합방선언 제1조에 따라 1884년의 조선-러시아간 수호 조약은 종료되었으며, 이에 따라 고려인은 일본제국의 신민이 되었다고 주장. 일제의 계속 된 요청으로 42명의 항일 지도자를 체포, 이르쿠츠크로 유배.
- 러-일 양국은 1911년 6월 범죄인상호인도조약을 체결, 고려인들의 반일운동을 탄압할 수 있는 법적 근거 마련.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국외로 추방되어 연해주 항일운동은 입지가 크게 축소됨.
⦁ 돌아갈 조국 없어 3만 명 귀화
⦁ 총독 운테르베르게르와 곤다티 : 황인종이 세계를 위협한다는 황화론에 입각해 고려인 경계, 일본의 앞잡이로 인식하여 배척. 후임 곤다티 총독은 고려인 옹호론자. 고려인이 성실하고 범죄성이 약하고 땅을 가꿀 줄 알아 높이 평가, 고려인 모두에게 국적 부여함.
⦁ 착취 일삼고 상투에도 벌금
- 고려인에 대한 차르 정부의 기본 정책은 민족적 억압과, 예속화, 러시아 동화주의와 대국주의, 배타주의에 기초함. 한마디로 제국주의. 황화론에 입각한 인종 차별정책. 거주구역 지정은 인종차별적 발상. 지주들의 노동 착취 만연. 차별 정책으로 법적 보호 받지 못함. 고려인에 대한 벌금징수에 혈안.
3. 권업회3) 결성, 민족혼 고취
- 러시아 동포들의 권익과 조국독립을 위해 활동한 고려인 단체의 양대 산맥이 대한인국민회와 권업회.
⦁ 한민학교 설립 · 권업신문 발간
- 권업회는 1911년 조직. 민족혼을 고취하기 위한 계몽운동과 학교 건립에 진력. 첫 사업으로 신한촌에 ‘한민학교’ 설립. 고려인들은 권업회를 독립운동자금 모금 등 항일투쟁의 수단으로 활용. 사실상 독립운동기관. 유인석, 이범윤, 최재형, 이상설,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신채호등으로 구성.
- 권업회 : ‘권업신문’을 통한 언론 활동. 고려인 사회의 교육 계몽과 통합에 크게 기여한 점 주목됨.
⦁ 러-일 결탁, 권업회 해산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러시아와 일본 사이가 동맹 수준으로 발전하자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엄령 선포하고 권업회 해산. 권업신문도 폐간. 지도자들 추방.
- ‘1911년 6월의 비밀선언문’에 의거하여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만 추방이 가능하다고 함. 러시아 지방 당국은 미귀화 고려인을 포시예트 지역에서 추방하는 정책을 법제화함.
제 4 장 혁명과 내전의 와중에서
1. 고려인 사회, 정치적 분화
⦁ 고려족총회 · 한족총회 : 10월혁명 이후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사회경제적 차별성이 표면화 되면서 정치적 이념에 따른 분화가 진행. 민족운동 세력은 여호 중심의 좌파와 원호 중심의 우파로 양분. 부유한 원호들은 반혁명파에 가담 친일화, 여호들은 혁명파, 빨치산4) 투쟁에 가담.
- 1917년 6월 고려인 사회의 대표기관 창설을 위해 제1차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 3분의 2는 원호인, 나머지는 여호인, 정치적 망명자들. 대회 주도한 원호인들은 여호 농민대표들에게 의결권을 주지 않고 발언권만 인정하는 의안을 다수결로 가결시킴.
- 대회 주도그룹은 항일운동의 과제보다는 원호들의 자치와 권리신장만을 추구. 헌법제정의회 대표파견, 원호인에 의한 한족대표회의 조직, 농업용 토지 요구, 교회로부터 학교 독립등을 결의. 결국, 임시정부 지지파와 소비에트 지지파가 대립하여 분열. 소비에트 지지파가 퇴장한 가운데 진행 된 대회는 “아령전체한인의 일대단체”의 구성에 실패. ‘고려족중앙총회’를 원호만으로 구성하는데 그침.
- 1918년 초 반 볼셰비키5) 적 입장의 고려족중앙총회에 대항하는 항일적, 친 볼셰비키적 조직인 한족중앙총회 발기. 여호, 원호를 불문 대동단결을 목표. 고려족측 대동단결주의 수용하여 한족측과 통합협상에 나섬.
⦁ 한인사회당 창당
- 한족중앙총회는 고려족과의 통합과 별개로 여호를 중심으로 친 볼셰비키적 전위조직의 건설에 나서, 1918년 2월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 개최. 양기탁, 이동녕 등은 광의단이라는 무장단체 조직하되 원동 인민위원회로부터 후원만 얻자는 견해/ 이동휘등은 볼셰비키즘에 찬동하고 볼셰비키 세력과의 밀접한 연대를 주장. 볼셰비키즘을 주장하는 수십명은 1918년 4월 28일 최초의 고려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설. 한국근현대사에 최초로 볼셰비키 유형의 사회주의 정당, 즉 공산주의적 정당이 출현했음을 뜻함.
- 한인사회당은 조국 독립문제보다 러시아 혁명의 참여와 지원을 1차적 과제로 추진. 1918년 6월 전로한족회 헌장회의 개최, 고려족중앙총회와 한족중앙총회의 통합 이행 위한 대회. 회의에서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할 것 등을 요구. 그러나 전로한족회 주도 그룹에 의해 모두 부결. 시베리아는 고려인 민족운동에 탄압적인 백위파의 천하가 되어, 한인사회당은 활동 중단하고 볼셰비키 세력과 잠적함.
⦁ 소비에트6) 수호 빨치산 투쟁
- 원동 소비에트 정권 붕괴된 후 원동전역에 빨치산들 생김. 최초의 고려인 빨치산 부대는 아무르주에서 창설, 1918년 10월 교사출신 공산주의자 박 일이야가 결성한 무장유격대. 1919년 3월 조선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원동지역 고려인들은 적극적으로 호응. 새로운 빨치산 부대가 창설. 독립군이라고 명명. 고려인들은 마을마다 빨치산부대협력위원회를 구성하여 빨치산을 지원.
2. 상해임정 참여 싸고 분열
⦁ 대한민국의회, 임시정부 자임
- 1918년 말 1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고려인들의 민족 운동을 다시 고무시킴. 1919년 2월 25일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중심으로 한 원동지역 지도자들은 ‘전로군내조선인회의’를 개최. 러시아 영내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독립을 선언하는 방안 논의.
- 대회는 전로한족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해 ‘대한민국의회’를 출범. 임시정부임을 자처하며,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 러시아와 만주의 무장 세력을 결집시켜 일본군과 대전한 뒤 각국으로부터 교전단체로 승인받아 조선독립 문제를 파리강화회의 의제로 상정시키는 것이 목표.
⦁ 두 임시정부 통합 실패
- 1919년 3.1독립선언 이후 국내외에서 등장한 임시정부 조직은 모두 10개.
- 실질적 활동 전개하는 실체
: 2월 결성된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 4월 13일에 성립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 8월 중순 통합안 : 국내에서 13도 대표 명의로 선포된 ‘한성정부’의 제도와 인선을 계승하되 상해 임정과 국민의회는 모두 폐지하고 임정 소재지는 상해로 한다는 것. 8월30일 국민의회는 신한촌에서 해산 결의. 상해 임시의정원은 개정된 임시헌법에 의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 국민의회/상해임정의 다른 이해로 반발.
⦁ 한인사회당 상해임시정부 참여 / 국민의회는 공산주의 전환
- 1920년 2월 국민의회는 해산했던 조직의 복원을 선언. 고려인 사회는 상해임정파와 국민의회파로 양분, 공산주의운동에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간 대립의 단초가 됨. 1920년 9월 국민의회는 공산당 도움 없이 활동 불가능. 대부분의 구성원이 공산당에 가입. 공산주의로의 노선 전환을 대내외에 공표. 2월혁명 이후 문창범을 중심으로 부유층을 대변하면서 볼셰비키에 반대하고 백위파를 지지했던 국민의회 지도부의 180도 방향전환.
⦁ 이동휘 밀사 모스크바 파견
- 이동휘 주도하의 상해임정은 러시아 지원을 구하기 위해 밀사 파견. : 러시아 정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독립군 장비 제공, 사관 양성소 설립 지원, 독립운동 자금 원조 등 요구하여 승낙 받음. 거액의 자금 운송. 1920년 9월 한인사회당은 당명을 한국공산당으로 바꿈. 모스크바 자금의 관리권을 둘러싼 이견으로 한국공산당은 곧 분열됨.
- 자금의 출처는 세계혁명을 후원하는 소비에트 러시아정부이고 사용처는 ‘한국혁명의 장’이기에 한국혁명의 중앙기관인 한국공산당이 자금 관리해야한다는 주장./ 한인사회당 중앙위원들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음. 결국 1921년 1월경 두 개의 조직으로 분열. 상해 임정에 내놓게 하려고 위협하기도 함.
⦁ ‘창조파’, 상해 떠나 연해주로 : 상해임정을 민족통일전선으로 개조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 운동이 추진. 양파의 대립으로 진전 안 되어 흩어짐.
- 창조파 : 상해임정을 해체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자는 의견
- 개조파 : 임정은 유지하되 헌법, 조직 및 정책을 실제 운동에 맞게 개조하자는 의견,
3. 두 개의 고려공산당 대립
: 3.1운동 이후 고려인 독립운동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점차 러시아혁명세력과 결합 강화. 시베리아와 원동 각지에서 고려인 공산당 조직들이 생김. 그래서 단일 지도부를 결성하자는 구상이 대두.
⦁ 이르쿠츠크파 태동 - 시베리아 볼셰비키세력의 중심지, 고려인 운동세력이 집결, 고려인 공산주의 운동의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 전로고려공산당중앙총회를 구성, 고려인 공산단체의 최고 기관 자청. 전한 공산당 창립대회를 앞두고 국민의회와 손잡은 것이 기원.
⦁ 슈마츠키, 치타 한인부 제거
- 코민테른7) 동양 비서부 전권위원 슈마츠키가 이르쿠츠크파와 손잡고 전로고려공산당을 일개 지방위원회로 간주했던 치타 한인부를 압박. 해체시킴.
⦁ 1921년 5월 이르쿠츠크파 창당
- 1921년 5월 4일 고려공산당 창당대회가 이르쿠츠크에서 개최. 고려인 사회 최초의 전국적인 공산당이 탄생. 이르쿠츠크 대회 후 다른 공산주의 조직이 중국 상하이에서 별도의 대회를 열고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 결성을 발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상해파 공산당 주도권 장악위해 투쟁심화.
⦁ 1주일 후 상해파도 창당
- 이동휘 일행은 모험주의자인 이르쿠츠크파 지도부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 이르쿠츠크 대회의 불법성을 규탄하는 고발장을 코민테른에 제출. 코민테른에서 승인 받은 이르쿠츠크파는 재판요구.
⦁ 코민테른, 양자통합 권고 / 두 공산당 해산명령 - 두 당 모두 없어짐.
4. 4월 참변과 자유시 사건 (일군에 짓밟히고 적군에 차이고)
⦁ < 4월참변 >
- 1920년 초, 시베리아지역에서 백위파가 붕괴된 이후 볼셰비키와 고려인 독립운동세력은 기세가 오름. 일제는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신한촌 등지에서 고려인에 대한 대대적 체포, 방화, 학살을 자행.
⦁ 신한촌은 민족투쟁 본거지
- 여호, 진보적 성향을 가진 고려인들의 중심지.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메카. 러시아 통제 밖에 있는 고려인들의 ‘작은 독립주’ 로 일제로부터 자체적인 경비단 조직하며 지켜나감.
⦁ 일군 4개 사단 동원해 공격
- 1920년 1월 백위파 정권이 무너지면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 완충세력으로 원동 공화국이 창건. 완충국 원동공화국이 들어 선 이후 미국 등 나라의 철수, 그러나 일본은 원동에 대한 영토적 야심으로 주둔. 1920년 4월 일본군은 연해주일대 장악. 연립정권붕괴, 백위파 재등장. 고려인의 반일성향 제거위해 탄압.
⦁ 300명 학살, 거리엔 비명 · 통곡 가득 - 신한촌 공격은 4월 5일 새벽에 시작.
⦁ 독립운동기지 역할 약화 : 4월 참변으로 인해 민족운동의 메카로서의 신한촌의 전통과 위상 무너짐. 신한촌에 일본군 헌병 초소가 설치되어 독립운동기지로서의 신한촌 역할은 약화됨.
⦁ 친일단체 속속 등장
- 4월 참변이후 일제는 고려인들의 민족주의 조직과 사회주의조직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고 관제친일단체를 강제로 조직. 여러 활동 결과 연해주 고려인 사회에서 반일 색채는 크게 쇠퇴. 사상 학교운영. 출판물 등에서 친일경향이 강화. 일제의 친일화 정책에 적극 협조한 것은 부유한 원호들.
⦁ < 자유시사건 >
- 자유시 참변은 고려공산당 창당 후 한 달 만에 발생한 독립운동사상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 1921년 6월 28일 자유시(현재의 스바보드늬)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군정의회가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아 상해파 군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동족상잔의 참변.
⦁ 고려인 군대 지휘권 싸고 대립
- 원동공화국 수도 치타에 소재한 러시아공산당 원동국 한인부는 고려인 군대 통합에 적극적. 1921.1월 전한임시군사위원회결성. 고려인 군대 통합시킴.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는 군대통합조치에 저항.
- 이르쿠츠크의 코민테른 원동비서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직. 고려인 군권을 장악하기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결국 1921.3월 ‘전한군사위원회’ 와 ‘고려혁명군정의회’라는 두 개의 경쟁적인 군사기구가 출현. 서로 자신이 유일한 최고 군사기관이라고 주장.
⦁ 러군, 상해파 무장 해제 · 학살 : 군정의회는 대한의용군을 축소 개편하려했으나 평화적인 군대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단행키로 함. 1921년 6월 28일 새벽 칼란다라슈빌리 군대는 대한의용군 주둔지 수라제프카 일대를 포위. 사할린부대와 독립군의 퇴로를 막고 무차별 공격.
⦁ 고려인 부대 소련군 예하로
- 아무르주에 남아있던 독립군 부대를 이르쿠츠크로 강제 이동, 일부 만주로 도주, 나머지 소련군 제5군단 예하의 별도 고려인 여단으로 재편. 자유시 사건은 일제에 대항한 정치조직 간 주도권 다툼. 단일 고려인 군대의 지휘권을 둘러싼 이견과 합의 부재에서 빚어진 참극.
- 이르쿠츠크파 : 사건 원인에 대해 각 세력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고 자파의 세력 확장을 꾀한데 있는 것으로 봄.
- 상해파 : 고려인 무장 세력의 통합이라는 대단한 일을 끌어낸 주체는 치타 한인부와 상해 한인사회당. 볼셰비키에 의해 양육된 이르쿠츠크파와 민족운동에서 고립된 대한국민의회가 군권쟁탈의 야심을 갖고 끼어들면서 벌어진 참사라고 단정.
5. 적군(赤軍)과 연대하여
⦁ 빨치산 36개 부대 3,700명 활동
- 수찬지역에서 형성과정과 이념이 다른 고려인 빨치산부대 간의 통합운동 일어남. 김경천의 지휘아래 ‘수청의병대’ 결성 . 수청의병대는 시베리아 내전이 끝날 때까지 백위파와 여러 차례 전투.
⦁ 이만서 한운용중대 49명 산화 : 1921년 12월 백위군과 일본군이 철도 장갑차를 앞세워 이만 시를 기습 공격. 한운용이 이끄는 1소대 대원 51명중 한운용 포함 49명이 전사. 2명 생존.
⦁ 볼로차예프카 전선 돌파 : 이어 2월 블로차예프카 해방전투에서 고려의용군이 영웅적인 모습 보여줌.
- 적 백 내전의 승패를 가름한 이 전투의 승리로 인민혁명군은 하바롭스크를 탈환. 하바롭스크 수복 후 적위군은 고려의용군을 정규군으로 승격. 연해주와 중국 국경지방의 무장부대들은 총합지휘로 고려혁명군을 출범. 마침내 1922년 10월 25일 적위군과 빨치산부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성함으로써 원동의 내전은 막을 내림.
⦁ 내전 끝나자 무장해제 · 부대해산 : 연해주 일대 해방한 적위군은 정규군 이외의 무력 인정하지 않음.
- 동맹군인 고려인 빨치산부대의 무장해제 요구. 고려인 무장부대의 항일 투쟁은 5년 만에 막을 내림. 부대 해산 후 대부분 공산당 당원이 됨.
⦁ 연해주 민족운동 막내려 : 소련은 일본군이 다시 연해주에 진주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고려인들의 무장활동을 제재. 1925년 1월20일 ‘일-소 기본협정’이 체결돼 독립운동에 타격입음.
⦁ 창조파 40명 소련서 쫓겨나 : 창조파가 러시아내 임시정부를 설치하려던 것은 모스크바 의도에 부합한 것 아니어서 불허됨. 소비에트 체제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조국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것 허용할 수 없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 때문. 연해주에서 민족운동은 불가능한 상황, 오히려 탄압 받는 지대됨.
제 5 장 소비에트 시대
1. 토지 소유의 기대 컸지만
5년여에 걸친 시베리아 내전이 끝나고 본격적인 소비에트시대가 온 것. 고려인 사회는 빠른 속도로 소비에트체제에 흡수되면서 조국인 한반도와 유리되기 시작.
⦁ 일본군 철수하자 적대시
- 일본군 점령 중에 있었던 러시아인과 고려인 사이의 대립은 무거운 흔적으로 남음.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이주명령을 내리고 살던 집을 헐고 구타행위가 빈발. 러시아인들은 고려인의 항일투쟁에 대해서도 비교적 적은 수의 고려인만이 러시아 빨치산과 함께 싸움에 나섰다면서 인색하게 평가함.
- 소비에트 당국은 조선 국적 보유자를 법적으로 일본 공민으로 간주해 불신하고 적대시.
⦁ “고려인은 협잡꾼” 비난, 추방 : 일본이 고려인을 통해 연해주에 계속 첩자를 침투시킨다는 이유로 연해주 고려인에게 자치를 허용 안함. 전원추방하자는 결의안 채택. 연해주 당국은 러시아 편에서 싸웠던 항일 빨치산의 처우에 대해서도 무관심으로 일관.
⦁ 농촌집단화 앞장서 : 레닌 사후 스탈린이 소련공산당 총서기 자리를 계승하면서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소비에트화를 적극 추진. 연해주에서는 농촌소비에트가 조직되기 시작. 농촌소비에트 조직에 앞장선 것은 빈농과 의병 및 빨치산 출신들. 위로부터의 혁명 적극 추종자.
- 토지 소유가 가능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적극적 참여. 위로부터의 집단화 지침을 철저히 시행할 공산당 조직이 급속히 농촌내부로 확대됨. 토지국유화에 관한 법령이 발효되기 시작하면서 임차지를 빼앗겨 처지가 더욱 악화됨.
- 소비에트 당국은 고려인들에 대한 지원정책과 동화정책 실시. 연해주당국과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원동혁명위원회 산하에 ‘고려인문제 전담기구’ 설치 –국적문제, 토지문제 등 해결.
⦁ 불평등 토지분배에 반발 : 1925년 토지문제 해결을 위해 연해주 토지국은 고려인 토지분배 3개년 계획 수립. 토착부농으로부터 잉여 토지를 압수해 고려인 농민을 이주시키기 위한 집단화 기금 조성에 착수. 그러나 고려인에 대한 토지분배 계획 취소됨. 토지 분배도 차별적 설정. 고려인의 노동력을 수탈해온 전형적 수법.
⦁ 러시아인은 빈농 착취, 호화생활 : 오히려 종장집단화를 추진하면서 고려인 재산을 몰수하고, 국경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고려인에 대한 추방정책을 강구하기 시작.
2. 강제이주 선행실험
⦁ 1932년 고려인 20만 육박 : 1920년 고려인 인수가 급속히 증가한 이유는 조선에서 일제의 수탈로 먹고살 길을 잃은 농민들이 간도와 연해주로 몰려온 때문
- 소비에트 정부가 토지 없는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있다는 소문 듣고 온 것. 소비에트 당국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조선인을 이주시킨 것이라고 인식. 연해주에서 쌀 생산의 급격한 증가가 외부 노동력의 유입을 필요로 함.(고려인만이 힘든 쌀농사를 해내기 때문.)
⦁ 오지로 3,000명 강제이주
- 조선과 만주로부터 쇄도하는 이주민으로 토지문제 더욱 심각. 토지 없는 고려인들을 하바롭스크 근방의 오지로 보내어 스스로 농사지를 개간토록 하는 제안. 고려인들을 국경지대에 둘 수 없다는 입장. 국경지역에 러시아인이나 유럽인으로 채우겠다는 의도. 러시아인 40만, 유대인 100만을 원동으로 이동시키려는 계획 입안, 추진. 원동지방 집행위원회 간부회는 고려인 분산이주 5개년계획 세워 추진. 북쪽지역으로 이주를 원치 않은 고려인들의 저항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함.
- 1929년 4월 소련은 제1차 5개년 계획에 따라 고려인 촌락에 대한 적극적인 농업집단화에 착수. 소농 중심의 촌락을 콜호스로 집단화하여 2-3년 내의 단기간에 사회주의 농업궤도에 올려놓겠다는 목표. 빈민들 착취하는 부농의 토지를 몰수, 농민 가축 수도 제안. 주거지, 가축, 가재도구도 공유화.
- 집단화 과정에서 고려인 콜호스8) 는 차별의 대상. 농지배분, 농기구 공급, 신용 대부등에서 러시아인 콜호스를 우대. 당국의 불공정 처사에 1930년 3-4월 집단농장을 이탈. 러시아 농민과 당원들이 고려인 콜호스를 공격해, 몇 개의 콜호스가 자진 해산 : 강제적 집단화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인들이 집단화에 앞장선 고려인들에게 반감을 가져 일어난 사건.
⦁ 집단화 반발, 대거 국외 탈출 : 조잡하고 가혹한 농업집단화 정책의 강행으로 중국으로 도망간 고려인들 많음. 1930년대 초에 고려인 인구 감소로 인해 원동지역의 농토 면적은 절반이하로 감소. 쌀 생산에 큰 타격. 그해 큰 흉년으로 고려인들 삶은 더욱 힘들어짐.
- 1931년 원동지역 당위원회는 집단화 과정의 과오를 인정.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을 바로잡기로 함.
⦁ 종파투쟁 빌미 지도자 숙청
- 소비에트 과정에서 고려인 사회는 지도적 인물과 자산가들을 대거 상실.
- 상해파의 경우 청결 대상이 없는 반면, 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의 경우 거의 모두가 출당되거나 추방됨. 1935-38년 대 탄압 당시 스탈린 정권은 상해파 구분 없이 각파 지도자들을 모두 출당시켜 체포. 고려인 인재들이 전부 없어지게 됨.
⦁ 조선인 입국 금지-교류 차단
- 1926년 소련은 만주와 조선으로부터의 이주민 유입을 심각한 위험으로 간주하기 시작.
- 1929년 원동지역 이주를 처음으로 제한. 1929년 9월 만주군벌 장학량이 동중철도 점령을 꾀함으로써 발발한 중-소간의 무력충돌,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 침략의 전초로 남만주에서 군사 활동을 시작하자 소련 역시 모든 조선인 방문객을 차단. 동시에 연해주 고려인에 대한 포괄적 귀화정책 시행. 고려인은 귀화하여 충실한 소비에트 시민이 되었고 콜호스 회원이 됨. 소련과 스탈린에게 충성하며 공산당 숙청작업을 열성적으로 지지.
- 고려인 농업집단화는 꾸준히 진행. 1931년 연해주 전체 고려인 농가의 75%가 집단화됨. 빈농과 고용노동자 위주의 소비에트 집단 농장으로 변모. 마을의 큰 예배당은 구락부로, 토호들의 집은 탁아소로 운영.
3. 잠재력 지닌 민족공동체
- 고려인 사회는 자신들의 관습과 전통을 유지하며, 커다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잠재력을 축적한 민족 공동체. 고려인들은 모든 수준의 국가 및 사회조직의 활동에 적극 참여. 민족문화가 발전하고, 인텔리층이 견고하게 형성됨, 창작분야에서도 높은 예술적 경지를 인정받음. 고려인 사회는 행정적, 문화적 자치도 어느 정도향유. 소비에트 고려인 문학은 급속히 발전.
⦁ 고려인 사회의 황금기 : 1923~33년까지 10년간은 고려인들이 소비에트 주권의 혜택을 받아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둔 황금기였다고 평가. 토지와 국적 문제가 해결되어 소련 공민이 되고, 고려인 민족 구역이 지정되어 자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들 수 있음.
- 인구 20만의 고려인 사회가 교육, 문화 기관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문맹이 완전히 퇴치되고, 7년제 의무교육이 30년대 초에 실시 된 것은 자랑할 만 함.
제 6 장 ‘국가테러리즘의 극치’ 강제이주
1. 피의 전야제 (1930년대 소련~ 탄압의 시대)
- 농업 집단화 정책의 폐해로 1932-33년 대기근 발생. 1934년 레닌그라드공산당 제1서기 키로프가 암살되면서 스탈린정권은 반대파 ‘대숙청’개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제단 위 무수한 희생의 피가 뿌려짐.
- 소련과 일본 첨예하게 대립. 1937년 6월 아무르강에서 관동군이 소련 군함1척을 격침.
- 7월 루거우차오사건9) 을 계기로 중-일전쟁 발발. 원동 소련군 총병력이 60만에서 130만명으로 늘어남.
- 소련의 고려인 강제이주는 1930년대의 이러한 일-소관계의 악화에서 기인한 것. 일본의 위협이 증대되면서 고려인에 대한 소련당국의 적대적 경계심도 커져서 정치적 탄압으로 수많은 지식층이 희생됨.
- 1934년 봄, 북사할린의 오하에 거주하던 고려인 지식인들은 일본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탄압당해 구금되어 대부분은 총살되었고 일부는 10년 징역형에 처해짐.
- 공산당 내 청결작업은 1935년 5월부터 ‘당증검열 및 교환’이란 명목으로 소련전역의 수십만의 당원들이 출당, 체포, 투옥, 징역, 사형 등에 처해짐.
분파싸움에 가담한 죄목으로 출당, 처형되고 오지로 보내짐. 소비에트화10) 에 앞장섰던 고려인 사회의 엘리트들이 이때 대거 숙청됨. (피로 얼룩진 광기의 시대)
2. '일본간첩‘ 누명 씌워
- 고려인 강제이주는 1937년 봄, 불어 닥친 스탈린의 새로운 반제(反帝)11) 숙청작업과 더불어 시작.
- 3월 16일 공산당기관지 ‘프라우다'는 일본의 간첩망이라는 기사를 보도하고 일본이 밀파한 조선인, 중국인 스파이들이 소련의 군대 집결, 해군이동, 철도 운행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기사를 냄. 고려인 사회를 일본 첩자의 온상으로 간주한 보도들은 몇 달 뒤에 강행할 고려인 강제이주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의 일환.
-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터지고 소련과 일본 사이의 긴장이 급속히 고조되면서 소련 공산당의 강박증은 더욱 심해짐. 고려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우수리 지방에서 소련군과 일본군 사이에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1937년 8월 21일 중국 국민당정부와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 이날 소련은 원동의 고려인 18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라는 긴급 명령을 내림. 소련 인민위원회와 공산당중앙위원회는 ‘원동지방 국경부근 구역에서 고려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안 제1428-426cc(1급비밀) 채택.
- 결의안에 명시된 목적은 ‘원동지방에서 일본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힘. 고려인 사회를 일본첩자의 온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근거지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으로 ‘격리’시킨다는 의미. 전략적으로 민감한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통제하기 어렵고 신용할 수 없는 적성민족’으로 여긴 것.
⦁ 강제이주의 잔인한 본질 : 강제이주명령 문서 내용은 상당히 인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헌적, 불법적이고 거짓과 모순이 가득함.
1. 소비에트헌법과 공산당 소수민족 우호정책에 배치되는 것으로 소수민족 고유의 생존권과 자결권에 대한 박탈임.
2. 원동지역 국경지방에 거주하는 고려인만을 이주시키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소련 내 모든 고려인을 추방대상으로 삼음.
3.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해 싸워온 고려인을 일본스파이로 몬 것은 누명임.
4. 명령서는 이주자들에게 사유재산과 농기구 및 가축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했으나 실제로 이주민들은 최소한의 식량과 옷가지만을 가지고 감.
5. 고려인들이 불가피하게 두고 간 동산, 부동산, 파종 종자 등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음.
6. 명령서의 5항은 국외이주를 위해 출국할 경우 간소한 국경통과 절차를 적용한다면서 11항 국경수비를 강화한다는 것은 상호 모순임. 국외이주를 시도한 사람을 이주행위자로 간주해 처벌했음.
- 일제에 대항해 싸워온 고려인을 일제의 앞잡이로 몬 것은 고려인들에게는 감내하기 어려운 모욕이었고, 소수의 간첩이 있었다한들 전체 고려인 18만을 한 번에 강제 이주시킨 것은 명백한 민족탄압이자 잔혹한 ‘인종청소’.
- 당시 원동지역의 고려인들은 잠재력을 지닌 성숙한 민족공동체를 영위하며 살고 있었음. 1860년대 이래 70여 년간 온갖 역경을 딛고 쌓아올린 모든 성과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며 폭력적인 파괴행위. 일제는 총 한방 쏘지 않고 원동 고려인의 반일역량이 무화된 데 대해 기뻐했을 것임. 고려인을 국경지역에서 추방하여 내륙에 가두어 두려고 했던 것은 러시아 위정자들의 일관된 사고. 일본인과 고려인이 구별 잘 안되었기에 연해주 안보를 위해선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한다고 늘 생각해왔음.
⦁ 학계의 견해
- 고려인 자치주 설립을 요구한 고려인에게 스탈린 정부가 응답한 것이 강제이주라는 것./ 고려인이 쌀, 면화, 담배 등 농작물 재배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것이라고 풀이하는 견해.(이러한 주장들은 주변적인 문제에 주목한 것이어서 흡족한 답변이 못됨.)
- 카자흐스탄의 강 게오르기 교수 견해 : 고려인은 스탈린 정부의 인질. 2차 대전의 전운이 다가오면서 고립감을 느낀 소련은 중국과 불가침협정을 맺고 고려인을 자국민이라고 억지를 쓰던 일제에 대한 스탈린정부의 입장표명이자, 해당민족에게 집단책임을 지우는 스탈린 정부의 집단 학살적 행태였다는 것.
- 김 게르만 교수 견해 :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래 소련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국가 간 갈등과 전쟁위협, 무력충돌등을 거론하며 소수민족에 불신 강했던 스탈린이 국경지역에 모여 살던 ‘신뢰못할’ 고려인에 대한 통제의 어려움과 근심에서 강행한 것이 강제이주라고 풀이.
- 동국대 이원용 교수 견해 : 대독전쟁에 대비한 소련의 포석이란 견해. 서쪽에서 나치 독일이, 동쪽에서 일제가 전쟁준비에 열을 올려 소련은 언제 협공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고 소련은 일제보다 강한 서부전선 독일에 우선 대비하기 위해 전선을 축소시킬 필요 있었음. 그래서 일제와 전쟁할 의사가 없다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 강제이주. (반일적인 고려인 주민을 원동에서 모두 내쫓음으로써 일제에게 우호적으로 보여 전선을 하나로 줄이는 한편 고려인을 자국민이라고 억지를 쓰며 원동문제에 간섭해온 일제에게 간섭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취한 조치였다는 것.)
⦁ 1920년대부터 준비작업
- 1920년대말 ~ 1930년 초에 고려인 3000명을 오지로 내쫓아 강제이주에 대해 ‘선행실험’함. 스탈린 정권은 1932년부터 3년 간 고려인의 인구분포, 소득, 교육정도, 경제력, 법적 상태 등을 정밀 조사한 후, 1935년부터 2년 동안 은밀히 고려인들을 직장에서 강제 해고하고 고려인이 갖고 있는 무기를 빼앗는 등 사전 작업 진행시킴.
- 강제 이주는 1937년 와서 고조된 위기의식과 강력한 권력을 배경으로 실행됐을 뿐. 공산제국 소련의 안보와 국가 이익 앞에 소수민족의 삶과 인권을 무시한 대표적인 사례. (강제이주 결정문이 세계에 알려지면 커다란 규탄과 반발에 직면할 것을 두려워한 듯 크렘린 문서고에 넣고 잠가버렸고 이 비밀명령서의 원문은 반세기가 넘게 감춰져 있다가 소련 해체되기 전 1991년에 공개됨.)
⦁ 총체적 강제이주의 효시
- 10만 단위의 총체적 민족이주는 고려인의 강제이주가 효시. 소련내 60개 소수민족 300여 만명이 집단적으로 강제이주를 당함. 그들의 죄목은 파시스트 독일에 대한 협력과 조국 소련에 대한 배신.
- 스탈린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적성민족들을 분산시킴으로써 전쟁에 대비한 대러시아주의를 실현하려했고 힘없는 소수민족의 운명은 공산제국 소련의 대국 쇼비니즘12) 에 유린될 수밖에 없었음. 이것이 강제이주의 잔인한 본질.
3. 지도층 2500명 체포-공포 조성
- 소련은 강제 이주에 앞서 고려인의 저항을 막기 위해 고려인 출신 지도급 인사 2500여명을 검거해서 숙청함. 고려인들의 죄목은 조작됐고, 정식 재판을 하지 않았고, 끔찍한 고문을 당한 후 흔적 없이 사라짐. (조작된 죄목: “일본정찰부 간첩이며 관동군 참모부의 과제를 받아 소련을 반대하는 폭동을 준비했고 연해주 일대 변방을 소련으로부터 탈취하려는 목적으로 무장봉기를 준비했다”는 날조된 혐의.)
- 공산당원, 장교인 경우 소련에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었지만 연행되어 처형된 죄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반역죄. 스탈린 정권은 간첩을 처형한 것이 아니라 고려인의 민족의식을 처형한 것.
4. 중앙아시아행 ‘검은 상자’ / 탄압과 공포 속의 강제이주
- 화가 안일님의 이야기(“1937년 강제이주를 이야기하려면 어느새 가축을 싣는 화차인 ‘바곤차’를 떠올린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한 달 여 간을 창문 없는 어둠 속에 짐승처럼 실려 가는 고려인들이 마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실려 가는 유대인처럼 여겨졌다.”)
- 고려인들은 ‘민족절멸(絶滅)’이라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녹슨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던져짐. 국가테러리즘의 극치.
그해 농사가 잘되어 모두 기뻐했었다. 추수를 앞두고 아직 덜 여문 쌀, 콩은 남겨둔 채 밀, 호밀, 귀리와 철 이른 과일만 거둬들이면서 가슴 아파했다. 돼지, 닭, 오리 등 가축은 잡아서 소금을 쳐, 식량으로 챙겼다. 노인들은 조상 묘소를 찾아가 수건에 흙 한 줌씩을 싸가지고 떠났다. 일부 공동묘지에서 무덤을 파헤친 것이 발견되었다. 이주민이 유골을 수습해 함께 떠난 것이다. 고려인들은 자신 소유의 가축, 농기구, 파종용 종자, 건축물 등을 국가에 양도했다.
⦁ 9월 9일 첫 열차 출발
- 고려인 이주민을 태운 첫 수송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것은 1937년 9월 9일 밤. 열차 안은 소독도 목욕도 할 수 없어 이주민들의 옷에는 이가 바글바글 끓었고 전염병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병자가 생기면 들것에 실려 열차에서 내려졌고 대부분 사망. 연약한 어린 아이들이 많이 사망했음. 열차가 서면 이름도 모르는 철길 근처에 시신을 묻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음. 주인 없는 시신은 밤에 열차 밖으로 내던져짐. 9월말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최초로 도착했고 뒤이어 알마아타, 크즐오르다, 카라간다 지역에, 10월 초 우즈베키스탄 국경지역에 속속 도착함. 이주민들이 도착한 곳은 초원과 바람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지역. 황무지에 이주민들을 두고 돌아갔고 이주민들은 결국 땅굴을 파고 삼. 연해주 고려인뿐 아니라 북사할린 지역의 고려인, 유대인 자치주에 살던 고려인, 콤소몰스크의 고려인, 바이칼호 부근 부랴트공화국에 거주하는 고려인 등 3200명도 모두 색출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주됨.
- 강제이주는 9월초~12월말에 걸쳐 2차로 나누어 진행. (1차는 국경지역 거주 고려인, 2차는 내륙 거주 고려인이 그 대상.) 고려인들이 살던 원동의 444개 마을은 폐쇄되어 지도에서 사라지고 쑥밭으로 변했고 폐쇄 마을 444개는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러시아 마을로 변한 곳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임.
⦁ 지구촌은 침묵하고
- 스탈린 정권은 강제이주를 ‘위대한 국가적 대사업’으로 찬양하면서도 극비리에 추진. 지구촌은 고려인 강제이주에 대해 침묵함. 강제이주가 어찌나 은밀하게 진행됐던지 유럽 민주주의 진영이나 독일 반공당체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음.
- 강제이주에 대한 유일한 항의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제였음 : ‘조선인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일본천황의 신민이다. 일본정부는 제국신민인 소련거주 조선인의 강제이주에 항의하며, 이들 조선인의 안전에 대해 조사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소련정부는 ‘소련시민인 고려인 문제에 대해 일본이 개입할 특권이 없다’며 단호하게 일축함.
- 고려인 강제이주가 세상에 처음 공개적으로 언급된 것은 40년이 지난 후 소련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3) 에 의해서임. 1970년대 그는 소련 강제수용소의 역사와 참상을 다룬 ‘수용소군도’에서 소련의 비인도적인 강제이주에 대해 비판.
5. 12월까지 18만명 이주
- 거대한 비극의 수송열차가 달려간 거리는 6000km, 고려인 총 수는 18만여명. 강제이주 도중 열차 사고, 기근, 질병, 추위 등으로 수많은 고려인이 목숨을 잃음. 집단발병이 많았던 어린이들 경우 홍역에 걸리면 60%가량이 사망. 소련당국은 수송과정 내내 고려인들을 감시했고 수송열차에 동승한 비밀경찰요원들은 ‘불순 분자’를 수색, 체포해 도착지 당국에 넘겼다. 기소된 고려인들은 ‘일본간첩’이라는 죄목으로 형 선고받음.
⦁ 강제이주 희생자 1만 6500명
- 강제이주의 비극은 스탈린의 잔인한 대국주의 정책이 낳은 결과이지만 그 원인의 주된 부분은 일-소의 적대적 대립에서 비롯됨. 이 틈바귀에서 찢기고 짓밟힌 것은 ‘나라 없는 백성’ 고려인들.
- 러-일 전쟁 승리 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러시아조선인, 즉 고려인까지도 천황의 신민으로 간주해 부당한 간섭을 일삼음. 일제는 고려인의 항일구국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러시아를 압박했고, 정탐활동에 고려인을 이용함으로써 소련의 안보불안과 고려인 불신을 부추김. 그런 의미에서 고려인 강제이주의 비극은 일본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음.
- 1937년 강제이주와 이를 전후해 얼마나 많은 고려인들이 죽어갔는지는 오늘날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음. 일설에는 숙청, 기근, 질병 등으로 9,5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하며 최대 2만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함. 고려인 강제이주는 해외한인이 겪은 아픔 가운데 가장 큰 상처이며, 결코 지울 수 없는 통한 의 역사. 고려인들은 그 피맺히고 억울한 사연을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한 채 소비에트정권 내내 가슴속에 깊이 묻고 침묵의 삶을 살아야 했음.
제 7 장 한반도-서역 교류사 <고대. 중세>
1. 서역은 한반도행 문화통로
- 한반도와 과거 서역(西域)으로 불리던 중앙아시아는 6천km나 떨어져 있으나 우리 한국인의 피 속에는 먼 옛날부터 서역의 혼이 유장하게 흐르고 있음을 발견함.
⦁ 한국인의 시원지(始源地)인가?
-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인들이 신성시하는 이스쿨호의 북쪽 호반에 촐폰아타라는 마을이 있다. 2000년대 초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시인 김지하는 이스쿨호와 촐폰아타를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 연결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해 주목을 끔.
- 해발 1600m의 산상호수 이스쿨에서 백두산 천지와 단군의 신시(神市)를 떠올림. 촐폰아타는 “고구려의 수도, 그 졸본(卒本)”이라고 외침. 발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 키르기스의 ‘키리’어원이 ‘고구려’ ‘고려’와 같은 혈통이며 이 나라의 최고봉 가운데 하나인 ‘칸 탱그리봉’의 ‘탱그리’도 우리말 ‘단군’의 근원이라고 주장. 고대 투르크어와 몽골어에서 탱그리는 하늘(天神)을 의미함. ‘칸’은 크다는 의미의 우리말 ‘한’과 같은 말.
-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키르기스어와 우리말은 뿌리가 같다고 함.(둘 다 알타이어 계통) 어순이 같고 비슷한 용어도 꽤 있음. 키르기스인들은 우리말을 금방 익히고 생김새도 비슷함. 원래는 바이칼호 서쪽의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다가 남하했다는 것. 바이칼호는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 알려져 있음. 그 옛날 키르기스인과 한민족이나 비슷한 지역에 살았으니 말도 비슷했던 모양임.
⦁ 고대 한반도는 스키타이 문화권 : 동아시아 청동기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스키타이 문화14) 의 발상지는 흑해 연안. 스키타이문화는 북방 유라시아 초원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초원로를 따라 전파. 서역, 중앙아시아는 한국으로 오는 문화의 교차로.
- B.C. 700-600년경 북방 기마 청동기인들은 알타이 산맥으로 진출. 한반도까지 스키타이문화가 들어오게 된 큰 물결이 인 것. 고대 한국의 복식이 관모에서 의복, 신발, 대,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스키타이 복식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이 때문. 고대 한국은 한(漢)나라와 문화교류를 하기 이전에는 스키타이문화권에 속함. 경주 일대 고분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유리제품은 초원로와 고대 한국문화와의 상관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냄.
⦁ 실크로드 따라 서역문화 유입 :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서역인 형상이 많이 나옴. 우리가 전통악기나 토착음악이라고 여기는 것 중에도 실크로드를 따라 흘러든 것이 많음. 우리나라 거문고는 인도의 ‘비나’라는 현악기가 그 원형. 장구도 인도에서 전래된 것. 자진모리 타령 장단도 인도장단과 같다고 함. 인도에서 불교가 들어올 때 불교뿐 아니라 음악을 포함한 인도 문화도 함께 서역을 거쳐서 들어옴.
- 한(漢)나라 이후 한반도와 서역 간의 교류는 중국대륙을 관통하는 실크로드가 주된 통로. 흔히 실크로드의 종점은 당나라 장안이라고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지선이 경주까지 이어짐. 나아가 그 연장선으로서 일본까지 파급효과를 미침.
- 서아시아풍의 화려한 문화는 간접적으로 한반도에 이식되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구법 여행을 갔던 신라 승려들에 의한 직접적인 문화 활동의 결과 신라 수도 경주 일대에는 인도와 서역 문화의 영향이 짙게 남겨짐.
⦁ 사천왕상, 무인석은 서역풍 완연 : 서역인들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해 살거나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음.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감은사탑 금동사리함을 장식하고 있는 사천왕상, 원성왕릉으로 추측되는 경주의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석은 서역풍이 완연함.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탈인 처용탈도 서역인을 형상화 한 것.
⦁ 고려. 조선시대도 서역과 교류 : 고려 때 벽란도15) 는 송, 거란, 왜, 동남아, 아라비아 상인들이 북적이던 국제 무역항. 고려시대에 유행한 격구나 타구는 서아시아의 스포츠인 폴로 게임이 그 원형임. 서역이 고려 시대에도 문화의 중계지였음을 보여줌. 고려는 송, 원, 서역문화와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독특한 문화를 창조함. 13세기 칭기스칸에 의해 통일된 몽골이 유라시아 일대에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중세 아라비아의 천문학, 기상학, 지리학은 고려 말기의 과학과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함.
2. 서역을 간 고대 한인들
⦁ 7세기 고구려 사절단 : 1965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 유적에서 발굴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12명의 외국사절단 중 마지막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외형, 복식 패용물로 미루어 고구려 사절설이 유력함. 7세기 고구려와 서역 제국은 중국으로부터 부단한 침공을 받아 항시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었음. 고구려는 수.당을 동서에서 협공한 목적으로 서돌궐을 비롯한 서역 제국을 상대로 동맹교섭을 꾸준히 진행함.
⦁ 혜초는 여행기 남겨 : 신라 구도승 혜초 (704-787)는 인도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순방하면서 각국의 역사, 문화, 정치, 풍속, 물산 등에 관한 사실적인 기록을 남김. 4년간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왕오천축국전. 혜초는 걸어서 세계여행에 도전한 최초의 한인이며 동서문명 교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룩한 선구자. 밀교승인 혜초는 50년간 당나라 장안에 머물며 밀교 경전 번역에 몰두하고 황제의 명을 받아 기우제를 지내는 등 많은 활약을 함. 그는 만년을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보내며 밀교 경전 역구와 전파에 일생을 바쳤고 고국인 신라에는 돌아가지 않았음.
⦁ 고선지와 원조 고려인 : 668년 고구려가 망한 뒤 30만명의 고구려인이 당나라로 끌려감. 당시 고구려인 인구가 70만명이었으니 40%이상이 포로로 잡혀간 것임. 고구려의 재기를 두려워한 당은 고구려인을 중원 각지로 분산시켜, 불모지를 개간케 하며 감시함. 고선지는 안서도호부의 총 책임자가 됨. 병력 3만이 주둔한 안서도호부의 주 임무는 실크로드 남, 북로를 따라 서역으로 가는 상인들에 대한 관리, 보호. 고선지는 고구려인과 강(羌)족으로 구성된 결사대 같은 특수군대를 거느리고 실크로드를 장악하려는 당나라의 선봉장이 되어 서역을 누빔. 고선지 부대에 편제된 고구려 유민 가운데 제지공이었던 포로에 의해 고구려 제지술이 전파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그렇다면, 고려인 유민 출신 포로들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하게 된 ‘최초의 고려인’들이 아닐까?
- ‘탈라스 전투’는 동서 문명 간 최초의 전쟁. 불교.유교 문화권인 중국과 회교문화권인 신흥 아라비아 간의 패권 다툼. 이 전투에서 당의 패전으로 서역에서 중국세력은 종언을 고하고 무슬림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는 전기가 마련됨. 세계사에 큰 전환점을 만든 전쟁. 이 전투에서 중국의 제지술이 서역으로 전해져 후일 서양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됨. 제지술은 서방에서 종이의 대량생산과 함께 지식의 대중적 보급 및 학문의 부흥을 진작시켜 유럽을 신문명 사회로 이끔. 고선지가 우연히 떨어뜨린 문화의 씨가 크게 자라 오늘날 종이문명을 있게 한 문명사의 대전환을 가져온 것.
제 8 장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진출 <강제이주 이전>
1. 1897년 24명 거주등록 : 강제이주 전부터 중앙아시아에는 고려인 사회가 존재하고 있었음. 그 수가 지극히 소규모여서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본격적인 역사는 1937년 강제이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함.
⦁ 고선지 이후 1,100년만의 출현 : 카자흐스탄 고려인에 대한 기록은 20세기 초에 나타남. 고문서에 따르면 1904-05년 러일 전쟁당시 ‘일본간첩 행위기도’를 예방하기 위한 러시아정부의 명령에 의해 수백 명의 고려인이 다른 황인종과 함께 원동지역에서 내륙 쪽으로 강제이주 당함.
- 대부분이 러시아정교회의 세례를 받았고 러시아식이름이 주어졌고 상투와 조선식 민속의상 착용이 금지됨. 이는 고려인들을 빠른 시일 내에 러시아화하고 다른 주민과 동화시키려는 차르정부의 정책에 따른 결과. 당시 기록에 나타난 이들의 직업은 세탁소 주인, 이발사, 상인, 수공업자, 일용 노동자, 하숙집 주인, 의사, 소형 시설물의 소유주 등.
⦁ 철도 타고 소련 각지로 : 1916년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통되자 고려인들의 진출은 알단, 마가단, 콜림, 우랄 등지의 광산지역까지 확산되었으며 러시아 최대 공업지역의 하나인 예카테린부르크 일대 공장에서만 2,500명의 노동자가 일을 했다고 함.
-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후 3년간 내전시기를 거치면서 고려인들은 소련의 전 영토에 흩어져 살게 됨. 소련 전역의 고려인 수는 10만 명 수준으로 증가. 이 가운데 8만 1800여명이 연해주 지역에 집중 거주.
- 혁명과 내전이 끝나고 소비에트 연방이 결성되던 1922년 소련 전국의 주요 지역에서 소규모 고려인 거주지가 형성되기 시작. 이들은 항만 건설, 벌목, 석탄채굴 사업에 참여.
- 1920년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에는 수십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음. 1924년 타슈겐트에서는 고려인 30명에 의해 경지 규모 110ha의 농업조합 ‘일심’이 조직되었고 훗날 소련 최고의 모범 콜호스로 명성을 날린 ‘폴리트옷젤’의 전신이 바로 ‘일심’. 고려인들의 권익보호와 문화수준 제고 등을 목적으로 결성된 ‘투르키스탄 공화국 고려인조합’이 운영되기도 했음. 이 조합에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지에 거주하는 고려인 28명이 가입.
2. 1920년대 유럽 러시아지역 확산
- 1926년 소비에트정부 출범 후 최초로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유럽러시아지역 거주 고려인은 926명. 주요 행정구역마다 소수이지만 고려인이 분포된 사실이 드러나 1920년대 중반에 이미 고려인들이 유럽러시아지역으로 확산됐음을 알 수 있음. 유럽러시아지역 거주 고려인들은 농촌보다 도시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음. 그 중심지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였으며, 고려인들은 주로 사무직, 전문직, 공장, 건설노동자로 일했던 것으로 판단됨. 당시 원동 고려인 사회의 농촌인구가 도시인구보다 훨씬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
⦁ 카자흐스탄에 벼 재배기술 전수 : 1920년대 후반 소련당국은 카자흐스탄 지역의 벼농사 진흥을 위해 벼농사 경험이 풍부한 연해주 고려인들을 이 지역으로 초청. 1928년 봄, 블라디보스토크에 살고 있던 고려인 70가구 300여명이 세미레친스크에 도착해 크즐오르다 근처 집단농장 ‘인테르나치오날’을 만들 어 입주하고 ‘카즈리스’라는 고려인농업협동조합을 결성하여 벼 파종에 나섬. 이것이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의 벼재배의 효시. 이들은 이듬해 1월 다른 농장에 볍씨를 나누어 주며 벼 재배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 1931년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벼 파종 국가가 되었음.
- 고려인들의 성공적인 활동은 벼 재배 기술습득에 관심이 큰 북캅카스지역에 영향을 주어, 1930년에 타간로스크 구역의 카자크 촌에 고려인 코뮌 ‘돈리스’가 조직. 그러나 이들은 현지 부농들로부터 견제받음. 소련은 1928년 3년간 연해주고려인에 대한 강제이주정책을 시행한 바 있음. 이때 (1930년) 고려인 170명이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짐. 1933년 타슈겐트주 베르흐네취르 췬스크 지역에 22개의 고려인 농장이 있었고, 1934년 이 숫자는 30개로 늘어났음.
3. 카자흐스탄 유배살이
- 1930년 카자흐스탄은 소련이 정치적으로 탄압한 원동 고려인들을 귀양 보내는 유형지로 유명했음. 당시 스탈린은 고려인 행정이주에 관한 지령을 통해 카자흐스탄을 고려인 유형지로 지정. 카자흐스탄의 오지에는 강제이주 전부터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 찍혔지만 ‘운 좋게’ 감옥이나 수용소 신세를 면한 고려인들이 나타나기 시작.
제 9 장 중앙아시아 정착 <강제이주 이후>
⦁ 끝나지 않은 시련 : 1937년 9월 초 원동을 떠난 고려인 수송열차가 카자흐스탄에 처음 도착한 때는 이 해 9월말. 최종 순간에 목적지가 변경돼 가족 간의 생이별이 많이 생김.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벽지 10여 곳에 분산 배치됨. 연해주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고려인들을 이처럼 분산시킨 것은 앞으로 자치주 같은 꿈은 아예 꾸지 말라는 경고로 이해됨. 당시 중앙아시아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수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해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었음. 카자흐스탄의 농업인구는 1929년 120여만호였던 것이 1934년 57만호 수준으로 크게 감소. 그런 곳에 고려인을 투입해 당면한 인력난을 해소하면서 고려인 전통적 농업활동인 벼농사와 채소 재배를 접목시키려는 것이 소련의 의도. 중앙아시아의 낙후된 농업발전을 위해 고려인을 활용하자는 것. 소련당국은 이주민들을 공업중심지에 풀어 놓는 것을 금하는 지령을 내려 고려인들은 농촌으로 가야 했음.
1. 땅굴 파고 움막생활 : 고려인들은 건조한 반(半)사막지대와 스산한 갈대밭 지역에 짐을 품. 우슈토베의 첫 정착지 땅굴자리 앞 표석에는 “이곳은 원동에서 강제 이주된 한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라고 새겨져 있음. 고려인 이주민의 90% 정도는 농업과 어업 콜호스에 배치. 토굴은 습기가 차고 탁한 공기로 질병에 걸리기 쉬웠고 이주민들은 모두 설사, 감기로 고생했고 아이들은 홍역을 앓았음. 의료시설이 없고 영양도 불충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음. 배고픈 고려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이 속출.
- 주변의 카자흐인, 우즈베크인, 기타 소수민족들은 불쌍한 고려인들에게 양식과 옷가지를 나누어 줌. 1937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워 얼어 죽는 사람이 늘어남. 하루 밤 사이에 한 부락에서 6-7명이 죽어 나갔다. 강제이주 후 첫겨울을 나면서 많은 노인과 2세 미만의 어린이 대부분이 사망. 1938년 12월에도 타슈겐트주의 세 지역에서 300명의 어린이가 홍역에 걸려 그 중 80명이 사망. 그렇게 한 3년이 지나니 마을에서 어린애들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음. (현재 고려인 생존자 가운데 1935-1938년생이 아주 드문 것도 이 때문.)
2. 거주 제한, 내륙에 갇힌 포로 : 중앙아시아에서도 고려인은 심한 정치적 탄압과 차별대우 받음. 고려인들은 공식적으로 ‘행정적 이주민’으로 분류됐음에도 불구하고 특별이주민에 관한 규정 적용받음. 특별이주민은 특정 거주지역을 이탈할 자유가 없으며 무단이탈의 경우 도망으로 간주돼 처벌받음.
- 고려인들은 공민증을 회수당하고, 향후 5년간 거주지가 제한된다는 검정도장이 찍힌 신분증 소지하게 함. 고려인은 ‘행정적 이주민’으로서도 여러 측면의 권리를 제한받음.
첫째, 국경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제한 당함. 근동 국가를 통해 일본인과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 우려.
둘째,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철도에서 먼 곳으로 이주시킴.
셋째,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한 정착지의 고려인 수를 농가 1000가구 이하로 제한함. 고려인들은 비밀경찰의 엄중한 통제 속에 살며 내륙에 갇힌 ‘포로’가 됨.
- 1953년 스탈린 사망 시까지 16년간 고려인들은 집단적으로 죄수 아닌 죄수생활을 해야 했음. 소련인 고려인들의 국가기관 취업 및 취학을 제한하고 정치적 진출을 봉쇄함. 고려인 청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은 사범대학, 농업대학뿐.
- 1938년 소련은 스탈린의 특명으로 고려어(조선어)를 소련 내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시킴. 이주지에서 다시 문을 열었던 민족학교는 모두 고려어 대신 러시아어로 수업하는 소련 일반 학교로 개편됨. 크즐오르다의 조선사범대학도 러시아어로 교육하게 됨. 이것은 사실상 민족교육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
- 고려어 교사는 다른 과목을 지도하거나 다른 직장으로 옮겨야 했고 도서관과 대학에 비치돼 있던 고려어 서적들은 소각, 폐기됨. 스탈린의 이 같은 조치는 소수민족들이 민족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 레닌의 원칙을 짓밟은 것. 고려인이 취할 수 있는 생존논리는 철저한 러시아화 내지 소비에트화 밖에 없었다. 고려인들 생활의 모든 면에서 러시아어가 침투하면서 어린이에게 러시아식 이름 지어주기가 유행했고 한국어는 멀어졌으며 고려인들은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가기 시작함.
⦁ 탄압, 처형 계속돼 :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소련 각지에서 또다시 검거선풍이 불어 고려인 엘리트들은 예심도 재판도 없이 사라짐. 30세 이상 되는 남자들은 툭하면 정치부에 검거되어 재판 없이 감옥으로 보내짐. ‘일본스파이’ ‘반혁명활동’ 등의 누명을 씌워 시민권 박탈, 출당, 정배, 징역, 처형 등을 계속 함. 고려인들에게 과거의 혁명이나 빨치산활동에 관한 기록, 유품을 남기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되었음. 일기, 회고록 등, 사진, 유물, 소지품 등 혐의를 살만한 자료는 모두 소각함. 고려인들의 과거 연해주 항일의병 활동, 신한촌 만세운동 등과 관련한 귀중한 자료와 사진을 오늘날 볼 수 없게 된 것은 이 때문.
⦁ 고향, 강제이주 언급 못하게 : 고려인 작가들은 강제이주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어휘는 물론이고 원동, 조국, 고국, 고향에 대한 향수의 표현이나 소련의 제도 정책을 비판하는 어떤 종류의 글도 발표할 수 없었음. 작품이 완성되면 이를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당 기관이나 검열기관에 바쳐야 함. 고려인들의 시는 새로운 조국과 새로운 고향에 대한 찬양일색으로 변화. 소비에트 고려인문단은 암흑기를 맞음.
3. 60% 재배치, 이탈 성행
- 카자흐스탄정부는 고려인들이 도착할 때까지 이주민 수와 직업에 대한 통계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해서 고려인들은 여러 지역에 임시로 배치해 겨울을 나고 봄에, 관련 자료를 토대로 농촌의 영구 정착지역에 재이주 시킴. 60%가 재이주의 고통을 경험했고 대다수의 고려인은 미개척지, 황폐화된 땅으로 보내져서 땅굴을 파서 갈대와 진흙으로 초막을 짓고 살아야 했음.
- 1939년 초까지 카자흐스탄 전역에 총 70개의 고려인 독립 콜호스가 새로 조직되어 3만 5724명이 이곳에 거주. (57개가 농업콜호스, 13개가 어업콜호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재배치사업은 전반적인 시행착오와 실패의 연속.
- 고려인들의 콜호스 이탈은 3가지 원인에서 기인함. 첫째는 1938-1939년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콜호스의 경영악화 때문이고, 둘째는 고려인들의 직업을 고려치 않은 콜호스 무계획적인 배치에 대한 거부이며, 셋째는 강제이주 시 발생한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이탈이었음.
⦁ 처절한 생존투쟁 : 모스크바는 고려인들이 원동에서 넘겨준 미수확 작물에 대한 현금보상을 1938년 3월 15일까지 지급하도록 지시했으나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음. 1938년 봄이 오자 고려인들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시작. 갈대숲을 베고 늪을 말려 수로를 파서 강물을 끌어들여 논을 만듦.
‘굶어 죽어도 종자벼는 베고 죽는다.’는 우리 속담대로 연해주에서 보물처럼 싸가지고 온 볍씨를 심음. 제공된 농기계는 낡아서 맨손으로 일해야 했지만 수 천년 묵은 갈대밭이 어느새 옥토로 변하기 시작함. 농사일이 바빠 집을 빨리 완성할 수 없어서 움막생활을 해야 했고 흙벽돌과 갈대로 지은 강변의 집은 습기가 많아서 아침이면 집집마다 이불과 요를 말리는 모습을 매일같이 볼 수 있었음.
- 봄에 파종한 쌀, 콩, 밀은 그해 가을에 좋은 결실을 맺었고 토착유목민들은 난생 처음으로 이 수확물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함. 고려인들의 근면성은 생산량 증대로 나타남. 고려인들은 이주한지 3년 만에 재기의 기틀을 마련해서 마을마다 학교, 병원, 축사, 정미소, 제분소도 세움. 모스크바 중앙정부는 고려인 집단농장에 세금을 면제해주었고 콜호스 곳간에 벼와 옥수수가 쌓였음. 고려인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 지역 간의 생산량과 생활수준의 차이는 고려인들로 하여금 당국의 금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콜호스 이탈과 국경 너머 재이주를 강행하게 함.
제 10 장 2차 세계대전과 고려인
1. 소련 승리 위해 헌신적 지원
- 1941년 6월 히틀러가 독-소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패기하고 소련을 공격하자 고려인들의 정치적 상황은 더 어려워짐. 검열이 강화되어서 고려인 거주지역과 모이는 장소에 검열위원이 상주해서 고려인의 대화를 모두 기록함. 이러한 불신과 탄압에도 고려인은 묵묵히 일만 하며 소련 승리를 위해 헌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과도한 공출과 헌납으로 고려인들은 겨우 먹으며 힘들게 살아감.
- 고려인들은 소련을 ‘사회주의 조국’이라고 부르면서도 적성민족으로 간주되었기에 입대할 자격 갖지 못해 조국을 지키는 전쟁에 나갈 수 없었음. 조국의 운명이 걸린 전쟁의 참호 속에 뛰어들지 못하게 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고려인들은 출전을 자원했고 청원서를 들고 군사위원부로 달려갔음. 적지 않은 청년들이 국적을 속이거나 성(姓)을 다른 민족으로 바꾸어 자진 입대함.
- 스탈린은 고려인들의 군 복무는 금지했지만 범죄 집단과 다를 바 없이 취급했던 노동군대에 동원시켜서 18-50세의 고려인 남자들 대부분이 탄광, 군수공장, 건설현장, 벌목장 등에 보내짐.
2. 남자는 ‘노동군’ 동원 : 노동군으로 동원된 고려인은 소련 전역에서 총 1만 4000여 명에 달함. 1926년생 청소년에 대한 노동군 동원은 음모적으로 진행됨. 이들은 자신이 전선으로 파견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들이 간곳은 전선이 아니라 후방의 강제노동수용소였음.
⦁ 중병 걸려 구걸하며 귀환 : 노동군에 동원된 청소년들은 하루 빵 700g만 배급받아서 항상 굶주림. 건설현장에 투입된지 6개월만인 1944년 6월 많은 고려인 청년들이 배고픔과 심한 노동으로 중병에 걸려 입원. 노동군은 기아와 추위 속에서 수형자와 다름없는 비참한 강제노동에 시달렸지만 죄수라고 부르지 않고 ‘동원노동자’라고 불리워짐. 식료품과 빵의 공급량은 작업량에 따라 달랐음.
- 혹심한 노동으로 탈진했고, 괴혈병이나 부종으로 신음했다. 노동군 생활은 전쟁터 못지않게 참혹했음. 봉급도, 옷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고 외출은 경비원이 동행하는 때만 허용. 영하 40-50도의 혹한 속에서도 털신 대신에 얇은 타이어로 만든 단화를 신고 살았음. 빈대가 들끓는 막사에서는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온몸이 빈대에 물려 상처투성이였음.
⦁ 카라간다 탄광서 2,000명 사망 : 전쟁 중 고려인은 직접 전투에 참여한 사람이 적어 인명손실은 적었지만 노동전선에서 모두가 쇠약해져서 건강을 크게 다침.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갔고, 행방불명됨. 전쟁기간 중 카라간다 탄광에서만 2000명 이상의 고려인이 사망했다고 함. 고려인들에게 노동군 생활은 강제이주 때보다도 더 끔찍한 재앙이었음.
- 전쟁 시기에 남자들 대부분이 노동군에 소집되면서 노동력 부족으로 곡물 생산량이 감소했지만 모두 국가에 바치다보니 식량이 부족.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들이 죽은 말의 말라빠진 고기를 뜯어가려고 서로 싸우는 무서운 광경이 도처에서 벌어짐.
- 1940년대 고려인들의 노동전선 징발은 역사에 잘 밝혀지지 않은 페이지로 남아 있음. 수많은 고려인 청년들이 야쿠치야, 코미자치 공화국 노동전선에 끌려갔지만 상당수가 돌아오지 않았음. 노동군 참가자들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진실을 규명하는 노력이 필요.
⦁ 강제이주 1946년까지 계속 : 소련 내 소수민족의 강제이주는 2차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까지 단속적으로 계속됨.
⦁ 특별이주민 신분 :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거주지 제한은 첫 5년 기간이 만료되자 다시 연장됨. 강제이주 5년이 지난 1942년에도 해제되지 않고 스탈린 사망(1953년) 이후까지 계속됨. 고려인들은 다른 지방이나 지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당국으로부터 특별증명서를 발급받은 뒤 내무인민위원회 지역부에 출석하여 서명을 해야 했음. 1945년 4월 독일의 항복으로 대조국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났어도 고려인에 대한 통제는 계속됨. 1945년 7월 소련은 고려인을 ‘특별이주민’으로 공식 분류.
- 고려인의 거주 지역은 중앙아시아로 제한했고, 당시 소련의 베를린 봉쇄조치로 인해 미-소간 대립 격화되고 국제적 긴장이 고조된 시기여서 거주등록이 엄격히 시행. 2차 대전 종전 후에도 고려인들은 철망 없는 수용소에 갇혀 2류 공민으로 살아야 했음.
3. 성공신화(神話)를 쓰다
- 한반도의 18배 땅, 중앙아시아는 광활한 초원과 사막이 자리한 곳으로 고려인들은 이 땅을 조국으로 받아들이고 버려진 땅을 옥토로 일구어 농업의 성공신화를 이룩해 나감.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이 벼를 처음 재배한 것은 아니지만,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에 쌀을 보급한 민족으로 유명해짐. 고려인들이 벼농사를 시작한 카자흐 및 우즈베크 지역은 그 후 소련의 주요 미곡 생산지로 성장. 1983년 소련 전역의 쌀 생산량 300만톤 가운데 90만톤이 카자흐스탄에서, 50만톤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생산되었다. 쌀 생산의 주축은 고려인.
- 카자흐스탄에서 채소는 1946년 생산량 기준으로 1965년 5배 이상 늘었고 양파는 49배 생산 늘어남. 고려인 농민들의 땀을 밑거름으로 이룩된 것.
⦁ 목화. 벼 경지 10배 늘려 : 전시체제에서 고려인들은 기적을 일굼. 일손과 도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속에서 콜호스 성원들의 헌신적인 노동에 힘입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콜호스들은 목화와 벼의 경작면적을 3.5~5배 이상 크게 확장시킴. 타슈겐트 일대의 벌판은 끝없이 이어지는 논으로 뒤덮였고, 목화와 황마가 자라는 낙토(樂土)로 변함. 특히 벼 재배는 우즈베키스탄의 소금기 많은 토양에서도 큰 수확을 낼 수 있었고 토양의 소금기를 씻어내는 이중의 효과를 발휘함. 전선으로 보내는 식량의 수요량이 많아지면서 곡물재배의 중심이었던 고려인 콜호스의 명성 높아짐.
⦁ 경이적 수확-수백 명 영웅칭호 : 고려인은 경이적인 수확기록을 세워 수십 명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수백 명이 훈장과 메달 받음. 전쟁기간 중에는 국방강화 명목으로 다액의 공재 구입이 강요되었고, 1년에 3차례 전선 위문품의 공출이 있었음. 고려인들 처지에서는 과도한 부담. 전쟁 시기에 고려인 농민들은 생계를 꾸리기 어려울 정도의 최저 생활을 감수.
⦁ 두려움 잊고 활기 찾아 : 전쟁 후 많은 노동자와 사무원들이 전선으로 나가게 되자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려인들이 시내에 들어와 살 수 있었음. 소수이지만 공민증에 도장을 받고 사증도 받게 됨. 고려인들은 부당한 모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의기소침하지 않고 뛰어난 노동 열정을 발휘하며 소련의 승리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공존의 토대를 쌓아 갔던 것. 현지인들은 강제이주민으로 끌려온 고려인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낌. 고려인들은 타고난 근면성과 민족적 특질로 인해서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현지인들로부터 배척당하지 않고 상호이해와 협력 관계를 넓혀나감. 능숙한 기술로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우즈베크인들에게 벼농사와 채소재배 기술을 전수해주었고 그들로부터 수박, 멜론 농사와 포도재배 기술을 배움. 함께 목화재배를 확장시킴.
- 고려인들은 온돌의 우수성을 타민족에게 알려주었고 우즈베크인들은 제일 먼저 이를 받아들여 사용. 고려인들이 현지인과 융화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공동의 노동활동 뿐 아니라 전통, 관습, 윤리, 사고 등 유사성이 크게 작용함. 고려인들의 부모와 노인에 대한 공경, 남녀관계의 보수성, 농업과 곡식에 대한 존중은 현지인들로 하여금 고려인들 속에서 정신적인 형제의 모습을 보게 만듦.
4. 북한 창건 전위대로 : 일본에 원자탄이 투하된 직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원동의 제25군을 함경북도 경흥에 진입시킴. 소련해군은 웅기, 나진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한 뒤 8월 16일 치열한 전투 끝에 청진을 점령.
⦁ 수백 명 파견, ‘소비에트’이식 : 종전 후 소련은 다수의 고려인 지식인들을 차출해 연해주, 사할린, 북한 등지의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투입. 이후 1950년대 초까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차출된 고려인은 총 2,700명에 달함. 그 중 수백 명이 북한의 정부, 군, 교육, 문화 및 경제 건설에 참여.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한 고려인 수는 대략 250-500명으로 거론됨. 소련은 북한 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1950년대 중반까지 당원, 군인, 기술자, 의사, 농업전문가, 대학 교수 등 다양한 전문가와 학자들을 개별적으로 북한에 파견.
⦁ 북한 통치 중심세력 부상 : 해방 초기에 고려인들은 소련군정을 지원하면서 김일성 빨치산파와 함께 북한을 통치해나간 중심세력. 북한 사회주의체제 건설에 소련에서 성장한 고려인들은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인력. 조선어, 한자, 러시아어에 능통해 소련점령군의 보조요원으로 북한에서 일하기에 적격. ‘고려인군단’은 북한에 소비에트 질서를 이식시키는 전위대였고 1948년 소련군 철수 후에도 계속 잔류해 북한에서 ‘소련파’의 근간을 이룸. 1950년대 중반까지 10년 동안 북한의 당, 정부,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소비에트 문화의 보급과 북한체제의 구축, 발전에 크게 기여함. 통역들은 소련군 사령부의 전권대사였고 고려인들은 이 시기를 ‘통역정치’시대라고 부름.
- 북한의 헌법, 당 강령, 토지 개혁안 등 주요 법안 작성을 주도한 고려인들은 당권과 행정권을 김일성에게 집중시켜 그가 북한 지도자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 허가이는 강제이주 전 28세의 나이에 연해주 고려인 공산당원 중 최고 지위에 올랐던 인물로 이주 후 우즈베키스탄 치르치크 지역공산당위원회 비서로 활동. 그는 소련공산당 강령과 규약을 바탕으로 조선노동당 강령과 규약을 만들고 소련공산당 체계대로 조선노동당을 만듦. 허가이는 김일성 정권을 조직한 설계사. 1949년 6월 조선노동당이 설립되자 허가이는 당 서기국의 1등서기가 되어 김일성, 박헌영 다음의 제 3인자로 부상함.
- 고려인군단 대부분이 소련 국적, 당적, 군적 등에서 제적되어 북한 국적을 취득, 북조선 노동당원이 되었으나 이들은 북한보다 소련에 충성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6.25전쟁 후 소련의 후광이 약해지자 결국 김일성에 의해 숙청됨.
⦁ 허가이는 ‘6. 25 실패’의 희생양 : 전쟁이 목표했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자 김일성은 전쟁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이 필요했음. 먼저 연안파 지도자 무정이 평양 방어의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철직되고 소련 출신 허가이가 강등됨. 박헌영과 이승엽등 남로당계 수뇌부 대부분이 미제 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함. 허가이는 60만 당원 중 75%인 45만명을 무분별하게 출당시켜 처벌했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비난을 받았고, 미군폭격으로 파괴된 저수지 복구사업을 지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 정치위원회 출석을 요구받았는데 출석 당일 허가이는 사택에서 자살했다고 북한 당국은 발표함. 유족들은 허가이가 정치적 이유로 암살됐으며, 암살을 은폐하기 위해 유족도 참여시키지 않은 채 사체를 서둘러 매장한 것이라고 주장. 허가이 사건은 소련파와 고려인의 구심점이 제거되었음을 뜻함. 고려인들은 가장 좋아하던 허가이가 없어진 후 김일성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불신하기 시작함.
5. 교육. 노동에 힘쏟아 : 고려인들은 강제이주 이후 억류된 죄수 같은 삶을 살면서도 생존과 미래를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임. 그들은 노동과 교육에 힘쏟아 우수하고 근면한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냄.
⦁ 신분상승 출구는 교육뿐 : 고려인들이 콜호스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육.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넓은 도시로 나가야했고 교육만이 도시 진출을 가능케 하는 탈출구. 고려인들은 전통적으로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음. 강제이주 1세대들은 자식들에게 아픔이 물려질세라 자녀교육에 온 힘을 쏟았고 밥을 굶어가며 자식들을 가르침.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는 1937년 첫 강제이주 열차가 도착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 유태인이 세계 각지에서 그러했듯이, 우슈토베의 고려인들이 합심해서 제일 먼저 지은 건물이 학교였음. 토굴집을 벗어나기 위한 자신들의 주택건설은 그 다음이었음. “공부해야한다. 이민족이 살길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한결 같은 절규.
- 고려인들의 도시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고려인의 러시아어 동화속도도 빠르게 진행. 도시생활의 언어 환경은 러시아어 중심일 수밖에 없었음. 고등교육의 기회, 직업선택, 직장에서의 승진기회등과 관련해 러시아어 효용가치는 더욱 중요하고 커짐. 스탈린 체제하에 짓밟힌 고려인들의 권리가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누구도 가질 수 없었을 때 고려인들은 교육, 고도의 전문성,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 명예회복을 찾으려 함. 고려인들의 치열한 교육열은 그들 자녀의 학력을 소련 내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림.
⦁노동 통해 자기존재 부각 : 고려인은 소련 소수민족정책의 성공사례로 종종 거론되었으나 소련정책의 성공이 아니라 소수민족 탄압을 딛고 일어선 고려인들의 성공사례로 보아야함. 고려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콜호스의 개척사.
- 쌀 재배 위주의 콜호스를 가지고 있던 고려인들은 물대기 어려운 갈대밭을 배정받고 수로건설에 힘씀. 그들은 하루 15-16시간씩 피땀 흘리는 힘든 노동을 감내해서 노년에 관절염으로 고생을 많이 함. 관절염은 농약 과다사용의 피해이기도 하고 소련시절 목화농사에 잎사귀를 빨리 떨구기 위해 맹독성 고엽제를 많이 썼다고 함. 고엽제는 사람들이 일하는 들판에 비행기로 뿌려졌고 고엽제 속 수은성분이 관절염 발병의 원인.
- 소련에서는 집단적 생산체계 내 구성원들의 생산 의욕을 자극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 각종 포상제도인데 최고로 공인된 것이 ‘사회주의노동영웅’이었고, 이 칭호를 획득하기 위해 수많은 고려인들이 피나는 노력을 기울임. 고려인 사회는 특히 노동영웅을 많이 배출함. 고려인들은 모스크바 중앙과 주변 민족들로부터 근면한 최고의 농업전문가로 인정받음.
⦁“적성민족 불신 씻자” 강박관념 : 강제이주를 당하고 멸시와 탄압을 받는 서러운 민족이 소련에 대한 조국애와 노동열정의 기적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자신들에게 행해진 소련의 정책들이 오해와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 고려인들은 여전히 스탈린은 순수한 사람이라고 믿었고 자신들은 세계에서 가장 공평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 고려인들이 노동과 교육에 매달려 사회적 성공을 추구한 것은 소련정부의 불신을 씻고 성공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희석시키고 탄압의 상처에 대한 치유수단으로 일과 공부에 매달렸음. 고려인들이 ‘일벌레’가 된 것은 강제이주의 악몽을 잊으려는 것과 무관치 않음. 중앙아시아 로 온 뒤에도 고려인들은 언제 어떻게 처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살아감.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체계에 철저히 순응함으로써 자신들의 애국심을 증명하고자 함. 일과 교육에 몰입한 고려인의 특성을 우수한 자질로 칭송할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민족적 정체성을 부정당한, 감시와 억압 속에 개인적 삶을 부정당한 민족의 고뇌가 감춰져 있음.
“노동영웅은 한마디로 일벌레를 뜻한다. 우리는 서로 노동영웅 되는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알고 죽자 살자 일만 했다. 정해진 면적에서 누가 더 많은 수확량을 내느냐가 영웅을 결정하는 주된 기준이다. 하루 잠은 4시간 자고 나머지는 일했고 가족들도 따라해야 하기에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허망하다. 내가 저 들판에 바쳤던 땀의 의미는 한마디로 소련의 권력층을 살찌게 해준 짓밖에 되지 못했다. 내 몸에 남는 것은 모진 골병이고 내 가족에 지워진 것도 넉넉지 못한 살림과 마누라의 저 병신 된 모습뿐이다.”
-‘우즈베키스탄 스베르들로프 콜호스에 사는 한운석님의 이야기 -정동주 ‘까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에서
제 11 장 스탈린 사망 후 넓어진 영역
-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 스탈린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흐루쇼프는 스탈린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을 감행. 스탈린 개인 숭배를 규탄하고 스탈린 시대에 행해진 소수민족 탄압과 강제이주를 공개 비판.
1. 거주 제한 해제, 정치참여 허용
- 1937년 강제이주 ~ 1956년 : 탄압시기, 유형(流刑)16) 기간
- 1956년 7월 소련 최고회의 ‘특별이주민들의 거주제한 조치 해제법’ : 중앙아시아라는 울타리 벗어나 보다 넓은 세계로 뻗어나감. 대도시로 진출, 러시아 고등교육기관으로 ‘돌진’
- 스탈린 대탄압 시대에 억울하게 희생된 70만명에 대한 명예회복조치 이루어짐.
2. 북한에선 숙청당하고
- 북한에서 김일성 권력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연안파와 소련파들이 반김일성운동을 준비.
- 김일성은 소련식이나 중국식이 아닌 우리식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주체노선), 중국파와 소련파에 대한 토사구팽 시작. 눈치 챈 고려인들 중 일부는 자진귀환.
- 김일성이 ‘흐루쇼프 수정주의자’라고 매도한 소련파 간부들 대부분은 1958~1961년 사이에 숙청됨. 사대주의자, 스파이 색출 및 사상 검토라는 이름아래 출당되고 투옥되고 학살됐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했던 조국에서 오히려 자신들을 죄인으로 옥죄려는 것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끼며 북한을 떠남. 북한에 들어가 간부로 활동했던 수백명의 고려인 가운데 1960~1970년대까지 중앙 직무에 남아있던 사람은 4명뿐. 김일성 숙청에 의해 연안파는 많은 사람이 체포,투옥,처형되었고 중국으로 도피한 사람도 1천여 명에 이르렀음.
3. 고향의 그리움과 역사복원
⦁ 스탈린 시절 ‘만쿠르트17) ’의 삶을 산 고려인들 : 뿌리에 대한 기억 잃고 오직 소비에트 시민으로만 살아온 자신들의 존재를 빗대어 표현. 1937년 강제이주는 고려인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은 역사적 사건. 그러나 고려인들은 적어도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자신들의 고향과 뿌리, 역사에 대해 원천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함. 소비에트체제에 동화하려는 노력이 가속화되면서 고려인들은 자발적으로 망각 선택하기도 함. 강제이주 1세대는 좀처럼 그들의 탄압경험을 자손들에게 말하지 않았음. 그런 이야기가 새로운 탄압을 불러올 것 같은 공포와 불안이 그들 뇌리에 깊이 박혀있었음.
-대물림으로 빛바랜 한복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
-스탈린 사망 후 1956년 소련공산당 제 20차 전당대회를 계기로 고려인에게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지면서 ‘고향’ 원동에 대한 그리움 표출, 피어린 역사 복원.
: ‘내 고향 원동을 자랑하노라’ (레닌기치의 기자 겸 작가 김세일, 1962년 발표한 시)
‘나는 조선 사람이다’ (김준 – 연해주를 그리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향의 근원인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감) / ‘십오만원 사건’(1964년 김준 장편소설),‘홍범도’(1968~1969년 김세일 역사소설): 역사적 인물 복원작업. → 고려인이 일제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살다가 잊혀진 인물들을 고려인 사회 한복판으로 불러냄. 고려인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무임승차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라는 것 강조.
4. 도시 이주, 전문직 도전 :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지자 도시로 활발하게 재이주. 고려인 최다 거주국이 카자흐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바뀜. 카자흐스탄은 벼농사와 채소농사 생태적 조건이 열악하고, 정착지 재배치 실패 등 수많은 시행착오로 인해 고려인 마음 붙잡는데 실패. 열악한 주택조건, 식량부족, 의료시설 및 약품부족 등으로 고려인 사망률 높았던 것도 인구감소 이유.
-1959년부터 도시화 급격 진행 : 높은 교육열과 사회적 신분상승의 욕구 강하게 작용.
⦁ 도시생활 적응과정에서 전통문화 거의 잃어버림. : 신분상승을 위해 치른 대가는 민족정체성 상실과 민족어 상실.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모국어 상실 속도 빠른 편)
⦁ 교직 종사자가 가장 많아 : 정치적 부문에서는 거의 버림받음. 사회적 차별을 조금 덜 받는 전문분야로 눈돌림. 학계, 문화예술 및 체육 분야 등에서 두각 나타냄. 지배층인 러시아인들은 종교적 민족적 감정으로 인해 저항하는 중앙아시아 민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고려인을 이용하여 교육자로서 역할하도록 함. 소련에서 교사는 급료가 낮은 직종이었음.
-정관계 진출은 미미 : 보이지 않는 민족차별로 인해 소비에트 중앙정부로 진출한 경우 거의 없었음.
-고려인들이 활동한 주요 정치 무대는 ‘변방’의 민족공화국 :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 (예. 키르기스스탄에서 11년간 농촌건설부 장관 재직한 ‘김 니키포르’ )
5. 독창적 생존전략 고본질18)
⦁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고려인들 성공 비결 : ‘고본질’(또는 ‘고본지’)이라는 특이한 임차농업.
- 고본질에 나서면 1년 중 8-9개월간을 가족과 떨어져 황량한 들판에서 지내고, 문명생활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 사전에 상당한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해야 함. 투기성이 강한 사적 이익추구 사업. 농사일로 장기간 집을 비워야하기 때문에 자녀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
⦁ 고려인의 소비에트 드림 : 동이 트고 질 때까지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일만 했음. 자신의 호의호식보다 자녀교육과 신분상승을 통해 이국생활의 한을 풀어보자는 마음. (가령 10가호로 구성된 작업반이 30ha 토지를 임차해 각 가호마다 3ha를 배정했다면 이 때 3ha 땅이 한 고본이 된다. 더 많은 땅을 경작할 인력과 자금이 있는 경우 두 고본, 세 고본을 받을 수도 있다.) 즉, 고본질이란 토지라는 고본을 바탕으로 경영하는 임차농업이라고 보면 됨. 늘 목표 미달에 허덕이는 콜호스에게 고본질은 고마운 해결사. 생산계획을 완수하고 초과 이행하는데 고본질 생산물 이용. 불로소득을 챙길 수 있어 고본질을 반김.
⦁ 경제적 비약의 길 : 구소련에서 가장 희망없는 분야로 여겼던 농업활동을 통해 특수층 수준과 맞먹는 삶을 영위하며 자녀들 장래까지 보장하는 가능성 보여줌.
⦁ 독특한 운용체 : 친족 중심의 ‘소공동체’(브리가다) - 집단농장의 하위생산조직이었던 브리가다 외형을 그대로 따랐음. 친인척+친구, 이웃, 학교 동창, 직장 동료 등이 포함되는 형태. 많을 경우 30~35명, 작을 경우 4~5명. 대개 10~15명 정도. 유대감과 결속력이 아주 강하고, 어떤 어려움도 구성원들의 상부상조를 통해 해결해 나감.
-브리가딜 : 고본질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리더. 구성원 대표 겸 경영자이지 고용주는 아니다. 고본질에서 생산 및 판매 주체는 어디까지나 개별 가호다. 특히 판매는 개별 가호가 전적으로 책임 짐.
-환금성 높은 양파재배 선호.: 고본질 초창기 주요 재배작물은 벼. 1960년대 이후 벼 중심에서 벗어나 양파, 수박, 오이, 가지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함. 양파는 재배가 까다롭고 힘들어 고려인의 근면성과 맞아 떨어지는 작물, 양파농사는 지력을 금방 약화시키기 때문에 한곳에서 연작하기 어려워 좋은 땅을 찾아 계속 옮겨가며 영농을 함. → 고본질을 유랑농업으로 분류.
-땅 없는 민족의 영농방식 : 1953년 스탈린이 죽고난후 고본질이 체계화되고 본격화됨. 고려인에 대한 거주제한이 폐지되자 거주지 중심을 벗어나 지리적으로 확대되는 계기 맞음.(장거리 고본질 시대 개막)
-고려인의 ‘전유물’ : 1950~1960년대 두 번에 걸친 콜호스 통폐합 과정을 통해 고본질 더욱 활성화됨.
-고본질은 고려인들의 자생적이고 독창적인 생존전략. 단기간에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말고도 자기 자신이 경영자가 되는, 다시 말해 개인적인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사업이라 단순노동과 차이 있음. 고려인에게 고본질은 생산의 장이고 생활의 장, 또 교육의 장. (자본주의에 대한 교육까지 수행)
⦁ 불법성은 뇌물로 수습 : 고본자는 소련 거시경제정책에서 경제활동 주체로 인정되지 않았음. 사적 영업행위였던 고본질은 사회주의 생산체제에 존재해설 안 될 시장경제 형태였기 때문에 종종 비난받았음. 고본자는 비합법적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임대인을 비롯한 국가 관리들에게 가장 손쉬운 착취대상이 됨. 현지 관리인, 책임자와 운전수, 지역관리 및 경찰에 대한 상납 등 사방에 뇌물이 따라 다님.
⦁ 시장경제활동 선도 : 현실적으로 묵인되어 오다가 1958년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농업집단청부제와 토지임대제도가 합법화되면서 고본질도 합법화됨. 높은 생산성과 수익성으로 인해 사회주의를 넘어 현재 자본주의 체제까지 계속되고 있음. 하지만 자랑스러운 평생 직업이라기보다 돈을 벌기 위해 참고 일하는 직업으로 간주. 국가 관리들은 고본자를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으로 취급함.
제 12 장 ‘역사의 미아(迷兒)’ 사할린 고려인
⦁ 러시아령 사할린 19세기 후반부터 소수 고려인이 들어와 어업과 농업에 종사함. 1905년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사할린은 양분됨. 일본에 할양된 북위 50도 이남 남부 사할린은 지명이 가라후토로 바뀌었고, 북부 사할린은 러시아가 계속 지배함. 그 후 1945년 일본 패전으로 가라후토는 다시 소련령 사할린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 종전 당시 4만 3천명 거주 : 2차 세계대전 시기 일제는 가라후토의 탄광, 벌목장, 어장을 비롯해 도로, 군사기지 등 건설현장에 최고 7만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을 투입해 혹사시킴. 탄광노동은 하루 2교대로 매일 12시간의 중노동. 제공된 도시락은 한줌도 안되는 콩밥과 간한 청어 한 토막이 전부. 노동자들은 때로는 너무 배고파 걷기 조차 힘들었고, 견디지 못해 도망치기도 했지만 결국 붙잡혀 감시인한테 맞아죽기도 함. 번 돈은 용돈만 주고 나머지는 강제저금. 하지만 저금통장이나 영수증을 받은 사람은 없다. 미군 폭격 때문에 사할린 석탄을 일본 내지로 운송하기 어렵게 되자 일제는 상당수 사할린 내 조선인을 본토 탄광으로 이동시킴. 패전 후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소련 앞잡이 짓을 한 때문에 전쟁에 졌다.”며 조선인 학살을 자행함. (‘미즈호(포쟈르스코예) 사건’,‘조선인 사냥’ 사건 등)
-‘사할린 한인사회’ → 같은 민족이긴 하지만 사할린으로 건너온 배경이나 과거 생활환경과 사고방식, 조국관이 달라 상호불신하며 반목했다.
⦁1부류 : 일제가 1939년부터 주로 남조선에서 징용 등으로 끌고 온 일본 국적 조선인.
⦁2부류 : 종전 후 소련이 파견한 소련국적의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 1부류와 3부류를 감시 통제, 계몽하기 위해 투입된 철저히 소비에트화 된 사람들.
⦁3부류 : 해방 후 북한에서 송출된 북한 국적 노동자. 1946년~1948년 6개월~3년간 계약으로 모집해 파견된 노동자들. 계약만료와 동시에 북한으로 대부분 귀환했지만 기간 연장하여 남은 사람들은 남북 사할린 주요 도시에 살면서 ‘고려인’이 됨.
⦁ 귀환 불허에 무국적으로 살아 : 일제 패망 후 사할린 고려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귀국길이 막혀 섬에 고립된 채 살았음.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자기 민족만 귀국시키고 조선인들은 사할린에 버려둬 기민으로 만듦. 전후처리과정에서 전승국인 소련도, 미국도 이들을 귀환대상에서 제외. 소련은 일본인이 빠져나간 사할린의 노동력 확보차원에서 이들을 억류 조치. 해방이 되었어도 정부를 세우지 못한 한국은 이들 문제에 관여할 수가 없었음. 그리하여 1990년 한-소 국교가 수립되어 영주 귀국의 길이 열릴 때까지 반세기 동안 그들은 ‘역사의 미아(迷兒)’가 되고 말았음.
⦁“북한 국적 취득하라” 회유 : 6.25전쟁 종전 후 남북분단이 결정적인 것으로 굳어지자 사할린 고려인들은 크게 낙담했다. 통일되면 귀국길이 열릴 줄 알고 기다리던 고국 귀환 길이 더욱 멀어졌기 때문. 1952년 말, 북한 정권은 무국적 고려인들에게 북한 국적을 취득하라며 회유에 나섬. 무국적자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반 이상의 고려인이 북한 국적을 취득함. 그러나 북한 송환 후 다시 사할린으로 탈주해 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북한 국적을 취소하고 소련국적으로 갈아타는 바람이 불기 시작. 1960년대 한국귀환운동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함. 1000명 넘게 청원 신청을 했지만 1976년 9월 일본에 불시착한 소련 전투기 조종사의 미국인도로 일-소 관계가 악화되자 사할린 당국은 청원 접수를 중단하고 고려인 귀환문제는 일-소간의 문제가 아니라 소련-북한 간의 문제라며 후퇴. 그리하여 미-소 냉전기간 동안 고국 귀환은 물론이고 한국 내 가족들과의 의사소통도 불가능.
⦁ 1980년대 소련 국적 대거 취득 : 1977년 1월 도만상 사건(남한이나 일본 귀환을 강력히 요구하던 도 씨 가족 등 5가구 40명을 소련 당국이 고향으로 보내준다면서 북한으로 강제 송환시킨 사건)이후 사할린 고려인들은 출생지 남한으로의 귀국 꿈을 접고, 소련 국적을 취득해 섬을 떠나 대륙으로 나가기 시작. 이들의 변화는 직업선택, 직위승진, 대학 입학 등의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 : 사할린 고려인의 운명을 극적으로 전환시킴. 소련의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 결정은 고려인의 모국방문 실현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 1989년 2월부터는 사할린 고려인들이 일본을 경유해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1년 후에는 사상 처음 대한항공기편으로 노인 120명의 집단적인 모국방문이 실현. 냉전의 장벽 때문에 막혔던 고향길이 반세기만에 열리는 실로 꿈같은 변화.
-사할린 고려인 중 북한 국적자는 1960년대 60%에서 1990년대 중반에는 1%대로 대폭 감소 : 88서울올림픽 및 1990년 9월 한-소 수교 이후 한국의 러시아 진출, 사할린 동포의 모국방문, 영주 귀국 사업 등 활발, 경상도,전라도 등 남한 지역 출신이 90%에 달하는 사할린 고려인의 한국 귀환 열망이 표출된 것이기도 함. 현재 사할린 고려인 99.9%는 러시아 국적을 가졌으며, 북한 국적과 무국적자는 거의 없음.
제 13 장 소련 붕괴와 그 파장
1. ‘전주곡’ 페레스트로이카
- 소련 사회 대변혁 :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
그는 경제 침체와 외교적 고립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대외적으로는 글라스토스트(개방)라는 실용적인 정책을 폄. 국가통제체제 완화,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관료주의 축소, 권력의 지방분산, 대통령제 도입 등 정치개혁 실시. 고려인들은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처음으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누림. 자유여행의 바람을 타고 역사적 조국인 한국을 포함한 외국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게 됨. 1989년 소련 역사상 최초로 자유선거로 실시된 인민대표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4명의 고려인(김영웅, 최 콘스탄틴, 조 바실리, 정 라지)이 당선.
⦁ 1989년 9월 소련 공산당 ‘민족정책강령’ 발표 : 민족 정책의 실질적인 대전환 조치. 소련 내 모든 민족은 민족자치를 향유할 수 있음을 천명하면서 소수민족이 그들의 민족문화와 민족어의 자유로운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최대한 보장한다고 선언. → 고려인들도 음력 설 다시 쇨 수 있게 됨, 한국교육원 설립, 한국어에 대한 관심 고조.
⦁ 강제 이주 비판 봇물 터지듯 :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강제이주에 대해 언급 가능. 그 진실이 밝혀진 것은 소련 해체 이후. 이전까지는 사학자들 소비에트체제 미화에만 급급함. 고려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음.
* 신순남(1928-2006) : 고려인 수난사를 집요하게 파헤친 거의 유일한 화가. 강제이주의 상처로 죽어간 수많은 고려인의 영혼을 달래는 벽화 ‘레퀴엠-이별의 촛불, 붉은 무덤’ 시리즈에서 본격적으로 소련의 만행 고발. 2m짜리 그림 22개를 엮어 붙인 총 길이 44m 대형 연작. 죽은 아이를 들고 절규하며 땅에 엎드려 통곡하는 사람들 형상은 강제이주에 대한 최초의 사실적 고발.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내쫓긴 신순남이 할머니 손을 잡고 현장에서 본 고려인들의 침묵과 상처와 죽음을 파노라마로 펼쳐낸 장엄한 기록화. ‘노예’였던 사람들 얼굴 눈,코,입 없이그림.
⦁ 1989년 소련개방과 더불어 ‘강제이주’ 역사 전면에 등장. 1989년 2월, 레닌기치에 실린 젊은 역사학자 김 게르만의 ‘원동에서 특별렬차로’ : 소련의 역사책이 강제이주를 부득이한 대책이란 식의 판박이 묘사로 일관하고 있으며 심지어 고려인들의 자발적 이주로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 소련의 고려인 이주 정책은 소수민족에 대한 스탈린의 병리적 불신 내지 대국주의적인 배타적 노선의 결과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 펼침.
- 작가 한진의 단편소설 ‘공포’,‘그 고장 이름은?’, 변호사 김 블라디미르 ‘국경을 누비는 두만강’,‘열차58’-고려인의 ‘잃어버린 역사’ 복원에 기여, 시인 연성용 ‘오, 수남촌’-강제이주 실상을 생지옥으로 묘사. 강제이주를 주제로 한 연극 ‘통과열차-37’..등
2. 고려인 탄압 죄과(罪過)인정
- 1989년 11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고려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탄압했던 역사적 죄과를 처음으로 인정하고 이들의 권리를 회복시킨다고 선언함. 소련은 이 선언을 통해 강제이주를 국제법의 기본과 사회주의 제도의 인도주의적 본질에 모순되는 엄중한 불법적 범죄행위였다고 공식 천명. 그리고 1991년 3월 이 선언의 후속 작업으로 과거 소수 민족의 강제 이주 및 탄압과 관련된 모든 문서와 비밀을 해제시켜 일반 국민에게 공개함.
-고려인의 명예회복 문제가 법적으로 확실히 매듭지어진 것은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승계한 러시아사회주의연방에 의해서임. 1991년 4월 ‘탄압받은 민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 공포. 소수민족들이 정치적 독립과 사회,문화적 자치권을 회복할 수 있게 함.
-1993년 4월, 러시아연방 최고회의는 ‘러시아 고려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 제정. 고려인에 대한 강제이주와 이주 후의 탄압이 불법적이고 범죄적인 조치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 개별 민족의 명예회복문제를 다른 최초의 법령으로, 다른 소수민족 정책에 기준이 됨. 그러나 이 법은 구체적인 귀환절차나 국적회복 절차를 규정하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 따라서 고려인의 연해주 귀환은 국가적 지원 없이 자발적,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함. 그리고 러시아 국적 취득은 청원에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되어있을 뿐, 강제이주 민족을 위한 별도규정이 없음. 까다로운 구비서류와 행정 처리에 많은 문제가 야기되어 아직도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고 무국적자나 장기불법체류상태로 남은 고려인 허다함.
3. 토착민 득세, 소수민족 차별
⦁ 민족주의 기반 15개 독립국 탄생 : 고르바초프의 급격한 개혁은 자본주의라는 무서운 호랑이를 한순간에 불러들였고, 공산주의 체제는 뿌리채 흔들림. 소연방을 구성했던 15개 공화국이 제각기 분리 독립 선언,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자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 사임함. 영원히 존속할 것 같았던 소련은 창설 74년 만에 완전히 해체되고 옐친이 주도하는 러시아연방이 과거 소련 정부 역할을 인수, 계승. 소비에트인의 조국이자 세계최강 군사대국 소련의 몰락은 고려인들에게 천지가 무너지는 청천 벽력같은 사태로 다가옴.
⦁ 러시아어 대신 토착어를 공용어로 : 고려인이 추구했던 소비에트화는 과거의 유산이 되었고 자본주의라는 시장경제체제와 독립공화국이라는 정치체제에 적응해야 할 새로운 도전에 직면. 신생독립국들은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면서 다수파 토착민족 언어를 국가 공용어로 선포함. 소수민족들은 민족 간 교제언어로서 러시아어, 공화국 내 공식 언어로서 토착민족어, 그리고 자기 민족어를 습득해야 하는 3중 언어 부담을 안게 됨.
⦁ 국경 생기면서 생이별 : 현지 민족어 채택은 단순한 언어상의 불이익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서 차별과 불평등을 야기. 도시와 농촌에서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던 고려인들은 대부분 현지민족으로 대체되기 시작함. 신생독립국들 사이에 국경선이 그어지면서 어제까지 같은 소련체제에서 생활하던 고려인들은 이제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외국인 사이가 됨.
⦁ 경제 무너져 생사기로에 : 국가별 독립적 경제체제로 전환하지 못해 극도의 경제난을 겪게 됨.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혼란과 소련 붕괴후 발생한 신생공화국내 산업공동화 현상.
⦁ 화폐 개혁으로 큰 손실 : 고본질은 새로운 국면 맞이함. 소비에트 드림 시대는 가버림. 농산물 판매시장이 국가별로 분할되면서 고본질 판로가 소련시절보다 크게 좁아짐. 자국화폐를 새로 도입하면서 현금 보유하고 있던 고려인들은 많은 금전적 손해를 봄. 이 과정에서 입은 물질적 손실은 고려인들로 하여금 더욱 물질 지향적인 성향을 갖게 만들었음.
4. ‘꿈속의 꿈’ 고려인 자치주 : 고려인 자치주 창설문제는 1989년 11월 소연방 최고회의에서 ‘강제이주민들에 대한 권리보장선언’이 채택됨을 계기로 제기됨. 자치주 후보지로는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사는 우즈베크공화국 내의 한 지역도 좋겠지만, 연해주를 최선의 후보지로 제안함. 그 이유로는, 대부분이 강제이주 이전에 정착해 살던 연고지이며 고국에 인접한 곳이라는 점. 연해주는 인구밀도가 희박한 저개발지역이어서 농업에 능숙한 고려인들이 재이주하면 원동지역의 식량난 해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강조.
⦁ 자치지역 ‘경제특구’ 설립요청 : 자치주 창설보다는 경제자치구역 설치가 보다 용이할 것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10인 위원회를 구성. ‘고려인 경제특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해줄 것을 공식 요청. 그러나 고려인 사회에서는 반대론, 회의론,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음. 결국 고려인 사회는 러시아 정부의 반발을 살 우려가 있는 자치주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못해, 이 문제는 점차 거론대상에서 제외됨.
⦁ 1910년대부터 자치 꿈 키워 : 러시아 10월 혁명 후 1918년 4월 창당된 ‘한인사회당’의 당원들은 하바롭스크 서쪽 비로비잔 초원에 고려인 자치주를 건설하려고 하였음. 이들은 소수민족의 자결을 내세운 볼셰비키와 협조함으로써 자치권을 획득하면 교육산업을 일으키고 군대를 양성하여 민족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한명세 – 1922년 11월 코민테른 제 4차 대회에서 연해주 고려인에게 민족적, 문화적 자치단위를 허용해 달라고 요구. → 1928년에 ‘고려공화국’ 건설운동으로 발전. 조선, 일본, 미국 등지의 동포들에게 격문을 보내 자치공화국 건설운동에 대한 범민족적 지원을 요청. 하지만 1929년 8월 소련정부는 고려인들의 청원을 기각하는 회신을 보냄. 그러나 1928년을 기점으로 고려인들은 독자적인 민족행정단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 있음.(포시예트 민족지구)
-1950년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고려인 자치문제 다시 제기. 요구는 실현되지 못함.
⦁ 러시아는 ‘문화자치’ 유도 : 개별민족에게 정치적 자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영토분할을 허용하기 보다는 민족적, 경제적, 문화적 영역에서의 권한을 확대해주는 민족문화자치 쪽으로 정책을 선회.
⦁ 자치영토 주장 사라져 : 강제이주 전만 해도 고려인은 연해주라는 특정지역에 20만명이 몰려 살았음. 그러나 지금 고려인은 총인구가 50만명이 넘었어도 연해주보다 100배나 넓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대표적인 분산민족임. 민족자취를 운위할 만큼 인구수가 많지 않은데다가 인구 밀집도가 매우 취약함. 고려인들의 자치 여건은 한마디로 말해, 연해주에 밀집해 살던 1937년 강제이주 전보다 더 나빠졌다고 할 수 있음.
⦁1996년 6월 러시아 정부는 소수민족의 문화자치권을 인정하는 ‘민족문화자치법’을 제정 : 소수민족들의 영토주권요구를 무마하여 독립운동을 저지해보려는 의도 숨어있음. 1996년 12월 러시아 고려인협회는 소수민족 중 최초로 러시아 새 민족정책과 민족문화자치법을 수용. 민족문화자치기구로서 ‘러시아 고려인 민족문화자치 중앙위원회’와 ‘민족평의회’를 조직하고 지역별 문화자치체를 구성. 현재 러시아 당국은 고려인에게 자치지역을 부여하는 방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
제 14 장 고려인 다시 황야에
1. 역마살 타고 났나 – 재이주 물결
⦁ 역사상 4차례 대 이주 경험 : 고려인의 삶은 유랑과 이주의 연속, 나그네 삶. 정서적 방황.
1) 한반도에서 두만강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의 이주
(19세기 조선의 기근과 봉건적 탐학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주’)
2) 1937년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중앙아시아로의 총체적인 강제이주
3) 1953년 스탈린 사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자유여행이 허용된 때 –교육이나 직업적인 이유로
4) 1991년 소련 붕괴 후 민족주의 선풍에 밀려 약 10만명의 고려인이 다시 유랑의 길로 접어든 때.
대부분 러시아행 재이주.
⦁ 소련붕괴가 민족이동 촉발 : 1991년 소련 붕괴는 역내 소수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킴. 신생 독립국가들의 소수민족 차별과 함께 악화된 경제난이 이들의 이탈원인으로 작용. 또한 북캅카스 지역의 내전과 민족분규로 인해 수백만의 이주민이 발생. 그동안 피땀 흘려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많은 고려인들이 ‘차별의 땅’ 중앙아시아를 떠남. 그 땅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국외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 고본질을 위해 이웃 나라로 향한 사람, 더 이상 유랑하지 않고 조상의 땅 연해주에 뿌리를 내리겠다며 떠난 사람, 제 3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로 인해 고려인 사회는 어수선했음. 1992년 발발한 타지키스탄 내전으로 본격화된 국외이주. 그들의 삶은 여전히 어려운 상태.
2. 두 흐름 – 러시아행과 한국행
- 소련붕괴 후 발생한 고려인 이주민의 특징은 체제전환과 민족분규의 희생자들. ‘강요된 이주민’이자 전쟁난민.
⦁ 한국취업, 주요 이동요인 부상 : 동서 냉전시대 고려인들의 남북한 인식은 대조적. 북조선을 ‘살기좋은 사회주의 형제국’으로 생각했다면, 남한은 ‘미제(美帝)의 지배로 고통 받는 저주의 땅’으로 여겼음.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할 때 자신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으로 남한이 아닌 북한을 꼽음. 그러나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고려인들의 이러한 인식은 달라지기 시작. 이후 한국이 북한을 제치고 고려인들의 ‘제1고국’으로 인식되면서 취업, 유학, 친지방문 등의 목적으로 한국을 찾는 고려인 수는 해마다 급증. 2011년 현재 한국에 취업중인 고려인은 1만 여명, 영구귀국한 고려인은 4,000여명.
⦁ 러시아로 향한 고려인 : 러시아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 1991년 공포한 ‘탄압받은 민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1993년 ‘러시아 고려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도 러시아 재이주 촉진, 민족적 뿌리를 찾고자 하는 귀소본능까지 작용해 원동지역으로 귀환하는 고려인 급증. (7~8만이 러시아 이주)
⦁ 재이주민들의 당면 문제 : 1) 신분상 불안한 법적지위 – 무국적, 불법체류 문제 해결 필요, 2) 경제적 어려움 – 빈곤의 악순환, 3) 가족 및 청소년의 문제 – 부모들의 다툼과 이혼, 방황하는 청소년들, 심리적 갈등과 위축, 일자리 부족.
제 15 장 재기하는 고려인 <유라시아 2000년대>
1. 자영업에 몰려 : 고본질은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으로 여겨짐. 큰 수익을 얻기보다 생존문제를 해결하는 소규모 생계형으로 바뀌어, 도시 근처에서 정착형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 많은 고려인들이 빈농화를 감수하기 보다는 차라리 농업을 떠남. 농촌을 이탈하여 도시 및 근교지역으로 이주해 살 길 찾음. 농촌에 남은 사람들은 다양한 영농방식과 상업활동을 다각적으로 모색.
-고본질 밑돈으로 도전 : 보따리 무역과 유통업, 주택 및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 운송업 등.
-주류는 의류상 : 상업, 자영업에 가장 많이 종사, 의류, 식료품, 식당운영..등
2. 카자흐스탄서 두각 : 한국자본의 투자로 생겨난 많은 중소사업체에 고려인들이 파트너로 참여하거나 혹은 고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을 습득. 고려인 사회는 다른 소수민족들보다 체제전환기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라짐. 금융, 건설, 가전판매 입지 굳혀 / 러시아에도 성공기업인 많아
-사할린 중산층으로 성장 : 사할린 고려인 사회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서울올림픽과 한-소수교를 맞으면서 활력 넘치기 시작.
-우즈베키스탄 기업활동 침체 : 장기적인 침체로 소비재 시장 활기가 없고, 정치사회불안으로 신규 투자를 꺼리는 경향.
-키르기스스탄 거상 상당수 고려인 : 중앙아시아의 물류 중심지 역할, 비슈케크–서울 왕래 보따리 무역
3. 선거직 도전 활발 : 소련 붕괴 후 심화된 민족 차별로 인해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고려인들의 공직 진출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됨. 무엇보다 체제 전환기의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정치활동을 전개하는데 어려움이 컸음. 고려인의 공직진출은 현저히 감소. 다만 선거직의 경우 지역사회에서 어느 정도 부와 명성을 쌓은 고려인들이 출현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 (예. 키르기스스탄 3선 의원 신 로만)
제 16 장. 유라시아 고려인 분포 현황19)
- 연해주 이주 시작부터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로의 재이주, 원동으로 복귀까지 고려인들의 생활권은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확산됨. 유라시아 고려인은 50여만명 정도. 유입 경로와 시기에 따라 세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륙의 고려인, 사할린 고려인, 북한 출신임.
- 대륙의 고려인은 ‘큰땅배기’로 불리며, 1860년대부터 한반도 북부에서 연해주 등 러시아 원동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후손들로 고려인 사회의 주류. 사할린 고려인은 1940년대에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 된 사람들과 후손들. 광복된 후 4만 3천여명이 남아 있었고, 4천명은 한-소(러)수교 이후 한국으로 영주 귀국함. 북한 출신 고려인의 수는 수천 명 정도로 알려져 있고 해방 후 북한에서 소련으로 갔다가 남은 노동자들, 소련으로 유학 왔다가 망명한 지식층이 대부분. 소련 해체 후 절정을 이루었던 이주로 인해 유라시아 고려인의 국가별 인구분포가 이전과 많이 달라짐. 러시아에 전체의 40%가 거주함.
1. 슬라브 문화권
1) 러시아연방
러시아 고려인 지역별 거주 인구수 | |
러시아 남부 | 6만 4,000명 |
모스크바/중부지역 | 2만 9,500명 |
사할린 주 | 2만 7,000명 |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 1만 8,050명 |
연해주 | 1만 7,899명 |
하바롭스크 주 | 9,377명 |
러시아 거의 전 지역에 걸쳐 점점이 분포돼 있음. 원동의 연해주 및 사할린에 주로 거주한다거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유럽러시아에 소수가 살고 있다는 인식은 잘못 된 것. 러시아 남부20) 는 1930년대부터 벼농사 전수와 고본질을 하러 갔다가 소련 해체 후 이주민이 몰려들어 러시아 최대의 고려인 집결지 됨.21) 농사짓기와 농산물 판매가 수월하고, 임금이 높으며, 러시아어를 사용하기 때문. 특히 볼고그라드 지역은 집값이 싸고, 개간할 토지가 많으며, 이주민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폄. 2000년대 중반 이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내 대도시 거주는 늘고 남부 농업지대 거주는 줄고 있음. 소련 해체 후 고본질로 하는 농업경쟁에서 밀리자 임금 높고 교육여건 좋은 대도시로 재이주한 것.
⦁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 대표적인 정치 경제 문화 도시로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교육 받으러 유학 온 고려인 1세와 이후 가족들이 합류. 모르스바 지역은 약 2만 9,500명으로 추정되고, 이 중 3,000여 명이 불법체류자라고 함.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에는 소련 해체 후 인구가 증가해 인근지역과 불법체류자까지 포함해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 고려인 3, 4세는 높은 학력과 도시적 직업에 많이 종사해 중산층이 많음.
⦁ <사할린> : 소련 붕괴 후 경제난으로 총인구가 줄고 있으며, 고려인도 2차 대전 종전 당시의 4만 3천명에서 대륙 이주와 한국 귀환 등으로 현재는 2만 7천명 정도. 현재 고려인촌은 없음. 사할린 고려인의 한국귀환은 1992년 9월 처음 실현22) 되어 한국과 일본 정부가 비용 분담에 합의하며23) 2004년부터 본격화됨. 2011년까지 영주귀국한 수는 총 3,906명. 하지만 2, 3세대 가족은 동반할 수 없는 방식 때문에 새로운 이산가족이 생기는 문제가 있음. 이주 역사가 짧아 다른 고려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정체성이 강하게 남아있고 2세들도 서울 표준어에 가까운 모국어를 구사함.
⦁ <연해주> :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에게 연해주는 ‘마음의 고향’. 1993년 공표된 ‘러시아 고려인에 대한 명예회복법24) ’에 따라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은 4만명 이상으로 추정. 절반인 2만명이 국경도시이자 연해주 물류 중심지인 우수리스크에 삼25) . 이 법 취지를 살려 ‘고려인 정착촌’, 일명 ‘코리아타운’이 생겼지만 일반주민 생활공간과 멀리 떨어져 있고 시설에 들어가는 비용 문제 등으로 2003년 와해됨.
1990년대 이주민들은 주로 채소농사를 짓고 장사, 시장점원, 건설노동자로 힘들게 생계를 이어갔고 국적취득 어려움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시장이나 관공서 등에 진출해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림. 무국적, 불법체류자도 크게 줄어들었음. 당국이 특별한 문제 없으면 1~2년 내에 국적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음.
⦁ <남부지역> : 남부는 러시아 곡창지대로 그 중 볼고그라드에 195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벼농사 기술 지도를 위해 이주하기 시작해서 농업콜호스 건설을 위해 합류해 5천 명 정도가 삼. 대부분 도시에 정착해 교육, 의료, 국가기관 등에 종사. 소련 붕괴 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부터 이주가 늘어 2000년대 전반 2만 명 이상이 됨. 새 이주민들은 주로 농촌지역에 정착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 따르면 볼고그라드 고려인 인구는 3만 명 정도이며 불법 체류자와 유동인구를 포함해 농번기에는 4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 대부분 볼가 강, 돈 강 사이의 비옥한 지대에 정착해 고본질 방식으로 양파, 토마토, 수박, 오이, 고추, 배추 등을 재배해 볼고그라드에서 나는 과채류의 60%를 생산. 농지 100ha이상의 대농, 농지 50~100ha의 중농도 있으나 대부분 농지 2~10ha의 소농. 북캅카스 지역의 로스토프 주 고려인 인구는 소련 붕괴 후 10여 년간 3배 가까이 증가. 대부분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집값이 싼 농촌에 살며 고본질을 함. 80% 이상이 농사 지음.
2) 우크라이나 : ‘유럽의 곡창’으로 알려진 곳으로 1970년대부터 고려인들이 고본질을 다니며 이주함. 경제적으로 살기 좋고, 우크라이나 대평원 농경지는 고려인에게 희망의 땅. 1990년대 타지키스탄 내전과 우즈베키스탄 민족갈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우크라이나 이주가 빠르게 증가해 약 3만 명이 살고 있다고 추정. 다른 CIS 지역보다 젊은 신흥 고려인 사회로 분류됨. 우크라이나 국적은 1만 3천명, 무국적자는 적게는 5천 명, 많게는 2만 명으로 알려져 있음. 고려인 농민들은 곡물농사에 주력하는 우크라이나인과 대조적으로 채소류와 고부가 과일류 농사에 치중. 동부 하리코프에는 고려인 300여 명이 ‘코리아타운’을 형성. 르보프나 하리코프 등 주요 도시나 공업지역 고려인들은 젊고, 높은 학력을 갖고 있고, 대부분 전문직 종사자들. 우크라이나 100여 소수민족 중 고려인의 교육수준이 가장 높음. 1980년대 이전 이주 고려인은 민족정체성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47명 중 46명임.
3) 벨라루스 : 1934년에 처음 고려인이 등장. 1950~1960년대에 중앙아시아에서 군인과 그 가족들이 많이 이주해 와서 1,200명 정도 살고 있음. 밀집 거주 지역은 없으며 순수 고려인 가정은 30세대 정도. 대부분 혼혈 가정. 1993년 벨라루스 고려인협회가 창설된 후 설날, 추석에 100명 정도가 모여 행사하고, 자체 한국어교육을 하고, 민족예술단을 만들어 민족문화 회복에 힘쓰고 있음.
2. 이슬람 문화권
1) 우즈베키스탄 : 구소련 지역에서 23만 명이라는 최다 고려인 인구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많이 줄어 16만 4천 명 정도로 추정. 낮은 출산율과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구 감소는 계속 될 것으로 보임.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5~6만 명이 다른 나라로 떠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불법체류자로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있어 앞으로 중앙아시아의 사회문제로 대두될 가능성 높다.”(고려인협회 관계자)
고려인들의 사회적 위상 저하 및 주류 사회에서의 배제, 집단농장 해체로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고,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어려움.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대표적 농업국가로 고려인 60%이상은 현지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농업에 종사. 1~2세대들이 개간한 집단농장 덕분. 하지만 독립 후 러시아 시장을 잃고, 정부의 곡물 수출 금지로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자 집단농장이 해체되고 고려인들의 경제생활이 악화. 도시로 가서 단순노무자나 장사꾼으로 연명하거나, 고본질을 위해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로 대거 이주하고 일부는 원동으로 가기도 함. 독립 후 한국기업이 진출해 초기에는 고려인들에게 일자리가 주어졌으나 현재는 별로 덕을 보지 못한다고 함. 우즈베키스탄은 소수민족의 국외 이탈을 막기 위해 노력 중이나 배타적 민족주의, 사회적 계층분열, 폐쇄적 경제정책 등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음. 그리고 소수의 우즈베크 기득권층이 ‘출세의 출입구’를 막고 있어 소수민족은 단순노동이나 서비스업에 국한되어 일함. 2004년부터는 100% 우즈베크어로만 공식서류가 발행되어 소수민족의 입지가 더 좁아져 많은 고려인들이 러시아, 한국, 카자흐스탄 등지로 떠나고 있음.
2) 카자흐스탄 : 고려인 10만 명 정도가 삼. 독립 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고려인들도 안정적이고 수준 높은 생활 함. 자민족 중심의 민족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민족 간 화합을 중시해 관용적이고 개방적. 정치적으로 안정 돼 있고 민족 갈증과 내전 가능성 거의 없음. 다른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달리 대부분 카자흐스탄에서 계속 살 생각을 갖고 있음. ‘자신들을 키워준 땅’이라 생각함.
강제이주 당시 80%이상이 농촌에 살았으나, 소련해체 후 협동농장이 무너지자 살길을 찾아 도시로 나가서 이제는 95%가 도시에 삼. 현재 알마티, 탈라스, 침켄트 등 남부지역 도시에 모여 삼.
알마티에 전체 고려인의 40.8%인 4만 2,959명이 삼. 알마티에는 소련시절부터 한글신문 ‘고려일보’, 우리말 극단 ‘고려극장’, 우리말 방송이 있어 고려인의 문화 중심지로 불리움. 카자흐인을 강제이주 당시 고려인에게 마지막 빵 한조각까지 나눠준 고마운 민족이라 여기고, 카자흐인도 고려인을 성실하고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함. 농경민족인 고려인, 유목민족인 카자흐인 사이의 역할분담을 통해 상호협력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신뢰가 있음. 고려인들은 “우리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니까 러시아 땅이 편할 수도 있지만 살기에는 카자흐스탄 땅이 좋다.”고 함. 러시아인은 민족적 우월감이 강하고 아시아인을 차별이 심하지만 카자흐인은 생김새과 사고방식이 비슷한 고려인을 별로 차별하지 않음.
3) 키르기스스탄 : 고려인들의 ‘신천지’. 기후가 좋고, 차별이 없음.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민주화된 국가로 평가받음. 튤립혁명이라는 시민혁명을 통해 독재정권을 축출하고, 부패정권을 쫓아 낸 뒤 중앙아시아 최초로 선거에 의한 평화적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룸. 1938~1940년 가뭄으로 카자흐스탄에서 농경에 실패한 고려인들이 오기 시작. 기후가 좋고 기름진 땅으로 알려지면서 1950년대부터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농민들이 모여들었고, 친척들이 모여들었음. 1953년 스탈린이 죽고 고려인 거주제한이 풀린 뒤 이주가 더 늘어남. 프룬제 시내에 고려인 밀집촌이 형성되고, 오슈 시장에 김치를 파는 고려인 여인 등장. 이주 초기에는 대부분 농촌에 거주했지만 현재 90%가 비슈케크 등 수도권 일대에 거주.
4) 타지키스탄 : 1941년 소비에트 중앙파견 관리의 가족들이 처음 이주하고, 거주지 제한이 풀리면서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대거 이주.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살다가 비교적 자원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한 타지키스탄으로 옴. 1959년 2,400명에서 1989년 1만 3,431명으로 늘어남. 고려인 도시화 비율은 90%로 다른 중앙아시아 나라에 비해 높음. 이주 초기 생활은 빈곤했으나 70년대 들어 정착 생활 안정됨. 절반은 수도 두샨베에 모여 살며 상업하고, 이외 지역에서 농업하며 쌀, 양파, 수박, 메론 등을 재배. 그러나 내전이 고려인을 유랑으로 내몰았음. 독립 직후 1992년에 정부군과 반군 간 내전으로 약 9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1만명 이상의 고려인이 주변 국가로 이주. 소련 시절 고학력 엘리트 고려인이 많았으나 전쟁으로 생활기반을 포기하고 피신해야 했음. 지금도 CIS난민 중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힘겹게 살고 있음. 2000년 고려인은 총 1,696명으로 1989년에 비해 1만 1,735명(87.3%)이 줄어듬. 내전으로 고려인 사회가 붕괴된 것. 1997년 내전이 끝났지만 복귀하지 않고 여전히 타지키스탄을 등지고 있음. “타지키스탄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부족한 일자리와 소수민족 차별로, 남아 있는 고려인들 대부분은 반찬장사, 식당 종업원 등으로 생계를 꾸림. 고려인에게 농지를 빌려주지 않거나 비싼 임대료를 물리기에 농사를 전업으로 하고 있는 고려인은 없음.
5) 투르크메니스탄 : 800명이 거주하며, 우즈베키스탄 접경지역에 고려인촌 집단 거주 600명, 수도 아쉬하바드 200명이 거주. 소련시절 고위공직 일부가 진출했으나, 독립 이후 소수민족 억압 정책으로 현재 공직자는 전무.
3. 무국적 고려인
⦁KBS <추적 60분> ‘무국적 고려인’
: “그들은 여전히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집이 없어서 들판에서 잠을 자고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품을 팔아 한 달에 150그리브나(약 3만원)을 번다는 림 유어시프(59)씨는 들판 위에 놓인 이불 한 채와 움막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는 1992년까지만 해도 타지키스탄에 집과 땅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전을 피해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모든 걸 잃었습니다. 무국적자이다 보니 공장에 취직할 수도 없고, 이자가 높은 사채 이외에는 돈을 빌릴 수도 없어 상황은 악화되고 있습니다.”
- 소련 붕괴 이후 최대 난제로, 50만 고려인 가운데 무국적 고려인26) 은 3~4만명으로 추정됨. 무국적자가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체류기간을 연장하지 않거나 적법한 이주 절차를 밟지 못해 불법체류자가 된 경우, 구소련 혹은 원적국 여권을 분실한 경우, 구소련 여권을 갱신하지 못하거나 신생 독립국의 국적을 재신청하지 못해 국적이 말소된 경우 등으로, 90% 정도가 CIS국적으로 러시아에 왔다가 여권 유효기간이 만료되거나, 여권을 잃어버린 경우.. 소련 붕괴로 15개 독립국가 생겨 나라마다 공식 언어가 생기고 경제사정이 악화되며,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이주함. 이 때 이주허가를 받지 않고 떠났기에 법적으로 여행자, 임시 체류자에 불과해 이주한 국가의 시민이 아님. 이후 법률적 무지, 경제적 여려움, 복잡한 국적취득 절차 등으로 무국적자가 됨. 이는 자원개발 붐을 타고 온 불법체류와는 성격이 다름. 소련 시절, 수십 년간 구소련지역 자유롭게 오갔고 지금도 가능함. 그런데 소련 붕괴 후 15개 국가 간 국경이 생기며 불법체류자가 되었음. 다른 나라에 정착하려면 본국에서 서류를 준비해 재입국해 절차를 밟아야 함. 하지만 비용27) 과 시간이 많이 들어 절차를 밟지 않아 법을 어기게 됨. 무국적자는 불법체류자로 노출되면 처벌부터 받아야하기에 단속을 피해 숨어 삼.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되고 무국적 비극이 되물림. 고려인 무국적자는 소련 붕괴가 낳은 역사의 피해자로 보아야 하며, 해법도 달라야 함.28)
- 한국 정부는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아 2007년부터 고려인동포 지원사업에 나서, 무국적 고려인 국적 취득 위한 사업과 외교적 노력 하고 있음. 2010년 5월 이범관 의원 발의로 ‘무국적 고려인동포지원 특별법’을 통과시키기도 함. 하지만 무국적 합법화는 국가의 주권 관련 문제이며, 각국의 법률/문화적 장벽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음. 특히 가장 많은 무국적자가 사는 러시아는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해 예외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음. 러시아 정부는 매년 쿼터제로 국적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범관 의원은 “정부 차원의 외교교섭을 통해 일괄 구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함.
4. 한국 속의 고려인
: 한국을 찾는 고려인 수는 해마다 늘어남. 고국의 따뜻한 품 기대하며 고국이주도 계속 됨. 하지만 우리말을 약간 이해하는 외국인 노동자로 취급될 뿐. “우리는 거기서도 남이고 한국에 와서도 남이다.”
고려인 동포는 재외동포 비자, 방문취업 비자, 유학비자 등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음. 2011년 방문취업 비자로 체류 중인 고려인은 1만 632명으로, 우즈베크 고려인-러시아 고려인-카자흐 고려인 순으로 많음. 고려인 최대 밀집거주 지역은 안산 땟골 삼거리(선부2동)로, 약 5천여 명이 삼.29)
제 17 장 고려인의 문화‧유산‧정체성
1. 세시풍속과 생활문화
- 혈연을 확인하는 민족적 문화요소가 많이 남아 있음. 가족 관계를 중시하며 부모 공경을 미풍으로 여김. 전통의례를 지키며 민족정체성을 확보. 돌, 생일, 결혼식, 환갑, 장례식, 명절에 혈연공동체를 중심으로 모이며,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제사, 한식날에는 대부분 직장과 학교를 빠지고 성묘함. 돌잡이, 결혼잔치 음식(닭, 증편, 찰떡), 장례식(혼 부르기, 염습, 명정, 무덤)
- 다른 민족 풍습에 영향을 받아 많이 바뀐 부분도 있음.
* 카자흐인 영향으로 50세 생일잔치도 크게 함.
* 러시아 영향으로 장례식 때 입관하며 관 뚜껑 덮지 않고, 관이 방에서 나갈 때 음악을 연주함.
* 결혼잔치, 회갑잔치 등이 파티 중심으로 바뀌어 감.
* 여성의 사회활동을 적극 권장하는 사회주의 국가정책 영향으로, 생활과 의례 주도권은 여자가 가짐. 의례에서 주로 여자가 부조금을 받고, 이혼 후 집은 여자에게 주어지고 남자가 집을 구해 나간다.
- 명절, 돌, 결혼 등 세시풍속을 이어왔음. 잔치는 잘 차려야 하며, 갚아야 하는 것, 널리 나누어 먹는 것이라는 관념이 있음.
* 한식을 가장 크게 쇰. 곳곳에서 자손 모여 풍성하게 음식 준비해 성묘함. 친척, 이웃 고려인들과 안부 묻고 어울림. 추석과 한식은 고려인 정체성, 동질성 확인해 주는 계기.
* 단오에는 공연과 노래자랑으로 흥겹게 보냄. 음력설은 거의 의미를 잃었다가 1990년부터 다시 쇰. 알마티 고려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로 자리 잡았음.
* 돌잔치는 고려인의 특징적 의례로 이어지고 있음. 친척과 이웃들을 초대해 한국 일반가정보다 크게 치름. 돌떡, 돌잡이 풍습이 남아있음. 돌은 집에서 하고 백일잔치는 안 함.
* 결혼은 대부분 연애결혼. 근래 이민족과 결혼하는 풍조가 늘고 있음. 알마티는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중이 40%에 이르고, 이에 따라 민족적 자의식이 부족한 ‘고려인 주변인’이 생기고 있음.
* 혼례는 거의 러시아식, 현대식으로 바뀜. 남아있는 전통은 남자 측에서 보내는 예단 이다. 결혼잔치, 생일잔치, 환갑잔치, 장례식에 참석할 때 반드시 부조를 함.
* 환갑은 어른에 대한 공경으로 중요한 행사로 여겨 자식과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치름. 인근주민과 다른 민족도 초대함. 절하고 술 올리는 의례가 끝나면 전통 민속춤을 추고 전통가요를 부르며 흥겹게 즐김.
- 상례는 전통이 많이 남아있고 대개 3일장을 지냄. 거울 가리기, 혼 부르기, 명정 쓰기, 곡하기 등이 특징. 집단농장에 있을 때는 고려인 공동묘지를 만들었음.
- 우리에게 생소한 고가이, 노가이, 배가이 등 성씨가 있음. 본래 우리말 표현에서 “고가요”, “노가요” 하는 것을 러시아 관리가 모두 성씨인 줄 알고 기록해 생겨난 것으로 알려짐.
⦁ 음식 : 빵-육류 중심 문화 속에서도 밥-장국 중심 채식문화 유지하는 것이 특징적.30)
- “하루 양식으로 어떤 음식을 이용하십니까?”라는 설문에 응답자 93%가 한국음식을 먹는다고 답함. 쌀밥을 주식으로, 시락장물(시래기된장국), 짐치(김치), 질금채(콩나물 무침), 디비(두부)를 반찬으로 함. 국시(국수)와 개자이(개장), 배고재(찐만두)를 별식으로 함. 무채, 고사리, 시금치, 전병, 찰떡 등 많이 먹음. 된자이(된장), 고추자이(고추장), 지러이(간장) 등 장류를 연해주시절부터 가정에서 담금. 오이, 가지, 호박, 파, 양파, 감자, 옥수수 등을 집안 텃밭에 키워 먹음. 음식에 설탕을 넣지 않고 채소를 된장에 찍어 먹음. / 화투문화, 동양의학 침술과 뜸 부활..
2. 무너진 집단농장
- 강제이후 주 고려인들은 집단농장(콜호스)를 중심으로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음. 집단농장은 안정된 생활기반을 주었고, 모여 살면서 우리말과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전승. 하지만 소련 붕괴 후, 대부분의 집단농장은 해체되어 고려인들 정체성 약화와 생활불안으로 이어짐. 대도시로 이주해 분산 거주하게 되었고, 결속력이 약화되어, 전통문화를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이 없어졌기 때문.
⦁강제 이주 후 초기 10년 성장과정
“1938년 4월 20일에 조선인이 이주하고 나서 모래산 밑에서 처음 콜호스 총회가 열렸다. 이 총회에서 ‘선봉’이라는 작은 콜호스와 연합하여 ‘원동’ 콜호스가 조직되었다. 그해 가을 새 집과 공동건물, 축사, 7년제 학교를 준공하였다. 첫 해에 284ha에 곡식을 심었다. 1939년은 콜호스의 건설기로 페르마, 구락부, 병원, 종람소, 탁아소를 건축하였다. 1942년 원동 콜호스는 최고의 수확을 거두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여성들이 트랙터 운전사 등으로 콜호스사업에 동참했다.1947년 11월 5일로 원동 콜호스는 조직 10주년을 맞이하였다. 1948년에는 이 콜호스에서만 사회주의 노동영웅 5명을 배출할 정도로 성장했다.” - 카자흐스탄 ‘원동’콜호스 대표 신현문의 회고문 (1948. 5.1 레닌기치)
- 대부분의 고려인 콜호스31) 도 이와 비슷한 성장과정 거침. 1960년대에 도시로 대거 이주하기 전까지 고려인 70%이상이 콜호스 중심으로 농촌에 거주했으며, 구성원은 100명~600명32) . 생산과 함께 행정, 교육, 문화시설을 갖춘 공동체로, 고려들의 일터이자 생활 근거지, 사회마당, 문화마당.
⦁ 최고는 모두 고려인 콜호스 : 우즈베키스탄 사회주의 노동영웅 650명 중 139명이 고려인 콜호스 출신. 고려인 콜호스를 선두 지휘한 황만금(폴리트옷젤), 김병화(김병화 농장), 김만삼 등 소비에트 신화 주인공으로 칭송됨.
⦁ 시장경제 전환 후 경쟁력 잃은 콜호스 : 콜호스 이탈로 고려인 농촌거주 비율은 1936~40년대 80% 이상, 1956년에 70%대, 1970년대 이후 15.9%까지 떨어짐. 1950년대, 1960년대에 있던 콜호스 통합/대형화 과정에서 고려인 콜호스가 토착민 콜호스의 부채를 맡으며 쇠퇴. 국가가 콜호스를 착취하는 정책으로 열심히 일해도 생활이 어려워 고본질을 하기 시작한 이유도 있음. 그리고 1950년대 초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벼농사 지대를 목화 재배지로 전환하며 벼농사를 짓던 고려인들이 도시로 가거나 국외로 이주해 쌀, 채소를 재배함. 무엇보다 1990년대 소련 해체와 시장경제화가 결정타였음. 농사가 경쟁력이 없어진 것. 지금 콜호스에 남아있는 고려인도 콜호스의 주택에 살 뿐, 농사를 짓지 않는다. 강제이주 후, 타슈켄트 일대에 10만ha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모두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고 고려인은 가진 땅이 없음.
3. 고려일보‧고려극장
레닌기치와 고려극장은 소련시절 본향과 모국어를 잊지 않도록 지켜주어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 지켜줌. 강제이주 당시 민족문화예술 기관이 모두 폐쇄될 때 유일하게 남은 우리말극단과 한글신문33) .
⦁ 고려일보 : 90년 전통 지닌 신문. 원동 최초 한글신문 ‘선봉’을 계승해 강제이주 후, 카자흐스탄에서 레닌기치가 속간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 후 고려일보로 이름 바꾸어 발행. ‘선봉’은 1923년 애국지사들이 창간한 민족신문. 매주 1회~2회 발행되고, 일정 이상의 수입이 있는 주민들은 의무적으로 구독 독려 받음. 1931년 1만부까지 발행함. 고려말 출판물은 검열을 받았기에 일제 식민지 조선 기사는 거의 보도하지 않고 농업, 농사 기사를 전면 배치. 제한이 있었지만 조선강제병합일과 3‧1운동 기념일에는 특집을 발행해 반일사상을 고취. 1937년 9월 12일자 1644호를 마지막으로 발간을 중단하고, 연해주 시대를 마감. 강제이주 후 중앙아시아에서 한글신문을 발행하기 위한 선봉 인사들이 각 정부에 복간을 요청한 끝에 카자흐스탄공산당에서 겨우 허락을 받아, 1938년 5월 15일 ‘레닌기치’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나옴. 초기 레닌기치에는 강제이주 때 흩어진 가족, 친척 찾는 유료광고를 내기도 함. 엄격한 검열과 용어 사용 제한으로 소련 공산당과 정부 선전이 주 내용을 이루고, 한반도를 염두에 둔 조국, 고국, 고향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음.
- 1954년 카자흐스탄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승격해 한글판과 더불어 러시아어판을 제작하고, 직원도 늘려 최고 전성기를 누림. 하루 1만 5천부, 매주 6회 발행. 스탈린 사망 후 고려인들이 명예회복 청원운동에 나설 때 레닌기치는 고려인문화센터 건립을 요구해 1958년 크즐오르다에서 주3회, 매회 20분의 우리말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고, 고려인 밀집지역에서 한글을 가르치기도 함.
- 1960년 ‘전 소련 공화국간 공동신문’으로 지위 올라감. 소련 내 유일한 한글신문으로 소련 내 모든 고려인의 대변지가 됨. 북한정권에 참여했다가 숙청되어 귀환한 고려인들을 기용하기도 함. 1987년 알마티로 본사를 이전. 고려인 작가들이 모국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광장으로 많은 신인 작가, 시인들을 발굴. (발표된 작품을 모아 ‘시월의 해빛’, ‘씨르다리야의 곡조’를 출간.)
-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카자흐스탄공산당 중앙위원회에 고려인 민족문화와 모국어 보존 필요성을 강력하게 요구해 이를 계기로 니자미사범대학에 한국어학과 개설. 페레스트로이카(1987) 이전에는 소련공산당 정책 선전 기관지 성격이 강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시행이후 고려인의 수난과 문화적 문제점을 거론하기 시작함. 강제이주에 대한 고려인 학자들의 학술논문도 게재했고, 그동안 고려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반도의 역사적 사건과 현재 상황도 보도하기 시작.
- 1991년 1월 1일 ‘고려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CIS거주 고려인 위한 국제신문으로 나선 후로 적극적으로 고려인 역사를 조명. 그러나 경영이 어렵고 한글 기사를 쓸 기자도 없고,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도 없는 실정. 소련 붕괴 후 공동우편망이 무너져 지금은 알마티 일원에만 보급되고 있음. 예산은 카자흐스탄정부, 고려인협회, 신문판매/광고/외부지원이 1/3씩 부담. 고려인 대부분 현지에 동화돼 민족의식이 희박해지면서 고려일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큰 문제.
⦁ 고려극장 : 전 세계를 통틀어 한민족 공연단체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 80년간 민족의 전통문화를 지키며 뿌리를 일깨우고 모국어를 지키는 보루역할. 창립 이래 350여 편의 공연을 하고, 500만 이상의 관객이 봄. 1932년 소련의 소수민족정책 일환으로 설립되었고, 1935년 고전극 ‘춘향전’을 처음 올렸고, ‘장한몽’도 올림. 강제이주 때 극단 구성원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나뉘어 고려극장이 두 개로 나뉘었으나 카자흐스탄 고려극단으로 1950년 12월에 통합. 강제이주 후 절망에 빠진 고려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순회공연 다님. 콜호스를 순회해 콜호스 극장이라 불리기도 함. 공연단이 오는 날은 잔칫날 같았음. 찢어진 동포들을 연결하는 역할하며 자리를 굳건히 함. 극단원들은 동포들을 위한 공연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함.
- 1964년 크즐오르다 주 소속에서 카자흐스탄공화국 소속으로 바뀌고, 1968년에는 알마티로 이전하고 ‘공화국음악희곡극장’으로 이름 바뀌었음. 그리고 무용, 음악 전담 공연단 ‘아리랑가무단’이 창설. ‘아리랑가무단’은 연 130회 가량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전역으로 순회공연을 다녔고, 객석은 늘 만원. 정치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 많았지만, 우리 고전과 역사인물을 각색한 공연도 많고, 1960년대 초반부터는 고려인의 실생활이 반영된 작품이 올랐음. 재정위기가 있었지만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와 한국대사관 지원으로 2000년부터 공연을 활성화하고 한국어 연극도 시도. 한국 사물놀이와 민요도 등장. 그러나 극작가 부족으로 우리말 희곡작품의 거의 생산되지 않고, 모국어 구사하는 젊은 배우가 부족하며, 무엇보다 모국어를 알아듣는 관객이 사라지고 있어 심각한 모국어 상실위기.
4. 민족정체성
- 연해주 이주 후 고려인들은 150년 간 한반도와 유리된 역사의 길을 걸었음. 그 시간만큼 의식, 문화도 한반도 한인과 많은 차이 보임. 고려인을 새로운 민족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옴. 1937년 강제이주가 민족적 정체성과 민족의식 상실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중앙아시아 이주 후 러시아화, 소비에트화로 정체성 상실이 본격화됨. 그나마 우리말과 민족문화를 유지, 전승할 수 있었던 농촌콜호스가 해체된 것도 정체성 위기를 가속화함.
- 고려인은 ‘신종 유라시아인’으로 한민족 전통, 러시아적인 것, 소비에트적인 것, 중앙아시아적인 것 등이 혼재해 있음. 한국 전통문화와 소통 가능하면서도 차별적인 문화가 된 것.
- 고려인의 장소적 정체성은 이중적. 황무지를 개간해 정착했기에 현 거주기에 애착이 강해 뿌리로서의 고국의 애착과 얽혀있음. 2, 3세 경우는 고향의식이 희박. 고려인 2세부터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했고, 2~4세대는 10%만 한국어를 쓸 수 있음.
*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은 언어다. 2010년 조사에 따르면 민족적 정체성을 ‘한민족’이라 답한 고려인은 74.6%이지만, “어느 언어로 사고합니까?”라는 질문에 80.4%가 '러시아어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한국어로 생각한다.‘는 13.9%였다. 실제로 유창하게 구사하는 언어에 대한 질문에 러시아어(85.1%). 한국어는 2.6%였다.
- 소련 시절에는 정체성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만 소련의 개방정책과 해체, 서울올림픽 등의 변화가 고려인의 민족정체성 자각과 회복에 기회 제공. ‘오랫동안 잊어왔던 고국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토착민족 문화와 현거주 국가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아야하는가’하는 문제에 직면. 그리고 ‘토착민족 사회문화에 동화할 것인지’,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갈 것인지’, ‘거주국과 모국 양쪽 문화와 정체성을 융합해 나름의 독자적 정체성을 발전시켜 갈 것인지‘ 고민함.
- 분단된 조국 통일이 역사적 책무이듯, 역사의 피해자인 고려인을 끌어안는 것도 우리의 역사적 책무. 고려인의 정체성 회복은 고려인만의 문제가 아님. 고려인을 한반도의 한인과는 다른 독립적인 한인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
“우리는 자연히 CIS 고려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내고 다른 민족으로부터 더 나은 점을 받아들이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한국을 떠나온 이후 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잃어버렸던 말과 문화를 복구한다 하더라도 ‘새 조국’(편집자 주: 현재의 거주국)에서 얻은 말과 풍습을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독립국가연합(CIS)에 사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가치이자 다른 민족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우리 고려인들의 능력인 것이다. 나는 고향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 동족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싶다. 한국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동족들을 잊지 않았으며 우리들과의 만남을 절실히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정말이지 어머니는 영원히 기다리시는 분이 아닌가.”
-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작가 김용택
< 맺는 말 > 왜 지금 고려인인가? - 그들을 재조명한 이유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의해 서역 정벌에 동원된 8세기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 그리고 소련 치하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20세기의 디아스포라’ 연해주 고려인들, 두 고(구)려인들의 운명이 보여준 공간적, 상황적 유사성은 1300년의 시차를 넘어 우리 민족사의 아픔으로 다가옴. 그러나 저력과 투혼을 보여준 고려인들. 언제나 주어진 시련을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창의적이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줌. 냉전 종식과 더불어 50만 고려인은 한민족공동체의 범세계적 고리완성에 참으로 큰 의미로 다가옴. 우리에게 고려인은 21세기를 함께 열어갈 대륙의 인도자. 이제 한국은 고려인들에게 든든한 조국이 됨. 이제는 우리가 따뜻한 동포애로 고려인들을 보듬고 손잡아주는 것이 필요함.
1)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던 말.(출처: 표준국어대사전)
2)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
3)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단체. 이종호(李鍾浩)·김익용(金翼瑢)·강택희(姜宅熙)·엄인섭(嚴仁燮) 등 연해주에 있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1911년 5월에 결성했다.
4) 빨치산은 러시아어 partizan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정규 군사조직을 뜻한다. 즉, 적의 배후에서 신속한 이동과 기습을 통해 적에게 피해를 입히며 일정한 조직체계가 없는 소규모 전투부대를 말한다.
5) 소련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정통파를 가리키는 말로 멘셰비키에 대립된 개념이며, 다수파(多數派)라는 뜻으로 과격한 혁명주의자 또는 과격파의 뜻으로도 쓰인다.
6) 러시아 말로 평의회 또는 대표자 회의를 뜻하는 단어. 그러나 이후 러시아 혁명 때 노동자 · 병사 등의 대의원인 소비에트 기관이 창설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의회에 대비되는 개념이자,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의 권력 기관이란 의미로 전용되었다.
7)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설된 공산주의 국제연합으로, 제1,2차 인터내셔널의 국제 노동자 협회라는 명칭 대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라는 명칭을 채택하여, 일명 코민테른이라 불린다.
8) 소련의 농업집단화에서 생겨난 여러 집단농장을 총칭.
9)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교의 루거우차오에서 중국 제29군의 발포로 인하여 행방불명자가 생겼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주력 부대를 출동시켜 루거우차오를 점령한 사건.
10) 공산주의화
11)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다른 나라, 후진민족을 정벌하려는 침략주의를 반대하는 경향.
12) 맹목적, 광신적, 호전적 애국주의, 배타적 애국주의를 뜻하는 말. 이익과 영광을 위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으며 국제정의도 고려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배외주의(외국 사람이나 외국 사상, 문물 따위를 배척하는 사상이나 주장. 또는 그러한 정치 이념), 편협하고 극단적인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
13) ‘러시아의 양심’이라 불리는 러시아 저항 작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 대위로 근무하던 중 투옥돼 10년간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그린 『수용소의 군도』로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소련 정치제제와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과 몇몇 동료 반체제작가들에 대한 소련 당국의 냉대를 끊임없이 비판하였다.
14) B.C. 7세기로부터 B.C. 3세기경까지 흑해 북안의 초원지역에 분포하고 있던 스키타이족에 의해 향유되었던 독특한 초기 철기문화를 지칭하는 말.
15) 황해도 예성강 하류에 있던 고려 시대의 국제 무역항. 벽란도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가까우며, 수심이 깊어 배가 지나다니기 쉽고, 뱃길이 빨라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무역을 하러 고려에 왔고, 벽란도는 당시 국제 무역 항구로서 크게 번성하였다. 우리나라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16) 예전에, 죄인을 멀리 외딴 변경이나 섬에 보내어 가두는 형벌을 이르던 말.
17) 침략자들이 말가죽을 머리에 씌워 기억을 잃어버리게 만든 노예.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한 채 노동만 하고 살아가는 키르기스 전설 속 형상.
18) ‘고본(股本)’: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하는 사업에 각각 내는 밑천, 즉 공동사업에 투자하는 분담금.
‘질’ : 어떤 행위나 행동을 뜻하는 우리말 접미사.
19) 2011년 외교부 재외동포현황 자료 기준
20) 볼고그라드, 아스트라한, 로스토프, 북캅카스
21) 세 번의 이주에 의해 형성됐다. 1950년대~1980년대에 파볼지예, 북캅카스 농업콜호스에 온 농업 종사자들, 1980년대 중반 페레스트로이카 때 고본질로 온 정착자들, 1990년대 소련 해체 후 전쟁과 차별을 피해 온 이주민들이다.
22) 1세대 76명 무의탁 영주 귀국자
23) 영주귀국에 따르는 비용은 일본, 귀국 후 생활비는 한국이 부담.
24) 러시아 고려인에게 강제이주 이전의 원래 거주지인 연해주로 귀환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독립국가연합 고려인에 대해서도 원한다면 러시아연방의 국적을 취득할 권리를 부여한다. 지역자치기관은 원거주지로 귀환한 고려인이 정착할 수 있도록 주택건설 지원, 국적 부여, 토지 분배, 특별융자 등 혜택을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집단 이주는 허용하지 않고 개별적 이주만을 허용한다.
25) 블라디보스토크 및 인근 5~6천명, 파르티잔스크 3천명, 나홋카 3천명, 스파크스 1천명 거주
26) ‘현재 거주하는 국가의 국적이 없는 고려인’으로 대부분 체류자격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불법체류자다. 실제 무국적자는 소수에 불과하나, 불법체류가 일시적 체류가 아니라 영구 정착하려는 것이기에 무국적자로 지칭하고 있다.
27) 무국적 고려인들의 연평균소득은 2천~3천 달러인데 국적취득 경비는 2~7천 달러다.
28) 우크라이나식 해법 : “무국적 고려인에 대해 한국대사관이 신분을 증명해 준다면 출국하지 않고도 국적회복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하겠다.”, ‘고려인국적회복위원회’ 구성하고 가동해 2007~2010년 고려인 900여명이 국적 및 영주권을 취득하고 거주 등록했다. 유례없는 인도적 조치다.
29) 이 중 720명은 사할린으로 일제 때 강제동원 되었다 영주 귀국한 동포다. 사동 ‘고향마을’에 산다.
30) 이제는 빵-육류와 함께 먹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시락장물과 국시에 고기를 듬뿍 넣고, 러시아 빵인 리표슈카와 중앙아시아 음식인 샤슬릭, 라그만도 즐겨 먹는다.
31) 콜호스 내 구성원 중 다수가 고려인이면 고려인 콜호스라 불리웠다.
32) 부양가족까지는 100~1,600명
33) 레닌기치는 모국어를 지킨 최후 전선이고, 고려극장은 흩어져 사는 동포들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공간이었지만 지금 고려인 젊은이들은 우리말 한글을 몰라 고려일보 구독하지 않고, 고려극장도 잘 가지 않는다.
'B. 교육 > 1. 한국의 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퍼온글]아리랑·쓰리랑의 의미와 어원에 대한 연구 (0) | 2018.08.24 |
---|---|
[퍼온글]전통음악의 구조와 원리 (0) | 2018.08.24 |
[퍼온글][아리랑모둠 노래나눔] 8-9월 중국 / 러시아 <씨를 활활 뿌려라>, <고려아리랑> (0) | 2018.08.24 |
옛적의 귀한 이미지 자료 (0) | 2016.12.04 |
탈북자가 처음 겪은 한국 생활 (0) | 2016.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