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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잔언약 -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전도와 사회선교

양선재 2018. 1. 19. 09:30


로잔언약 전문

http://changmoolee.tistory.com/362 


Ⅰ. 로잔운동의 태동과 그 배경

 

  1.1. 제1차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 (로잔 대회, 1974)


  로잔 세계복음화 운동(Lausanne Movement for World Evangelization)의 기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제 1차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는 1974년 7월 16일부터 10일간 스위스 로잔에서 있었다.


  이 대회에는 150여 국가에서 약 2700여명의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고, 한국에서도 65명이 참석했었다. 이곳에 모인 목회자, 신학자, 선교사,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된 성도로서의 친교를 즐기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과 역사에 대하여 찬양하며, 함께 기도하고 연구하고 토의하는 가운데서 지난 날의 부족을 회개하며 '세계선교'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이 대회가 끝나자 타임(Time)지는 이 대회에 대한 기사를 크게 다루면서 "지난 주 스위스 로잔 호수 주변에서 모였던 대회야말로 지금까지 모였던 크리스천 모임 가운데 아마도 가장 광범위한 모임으로서 보수적이요, 성경적이요,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활기를 보여준 모임이었다"고 평했다. 그뿐 아니라 이 대회는 로잔에서 30마일 떨어진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주도하고 있는 '입장 (prevailing philosophy)'에 대해 큰 도전이 되었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이 대회를 계기로 대회 후에도 계속 모임을 가지며, 결국에는 하나의 생기 있는 국제협의회로 진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고 타임지는 평가했다.

 

  기독교 밖에서 보는 이런 평이 기독교 내에서는 더 크게 메아리쳤다. 독일의 선교신학자 피터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e)는 이 로잔대회를 평하기를 이 대회는 마치 지금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강들이 한데 모여서 그 물길이 크고 깊어져 복음주의적인 고깃배의 떼를 나를 수 있게 되었고, 20세기 후반기 기독교의 건조한 땅을 영적으로 비옥케 만든 것과 같이, 참석자들의 신학적 사고와 선교활동에 막대한 자극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변화된 참석자들을 통해 세계에 흩어져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물론 전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관찰했다.1) 

 

  로잔대회 때 프로그램위원회의 의장이었던 포드 박사는 "이 로잔대회는 하나의 대회 행사라기 보다는 과정으로 계획되었고 그 준비와 연구에 있어서도 계속적인 활동의 결과"2)라고 지적했다. 이는 이 대회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세계는 1960년대에 이르러 급변하는 상황에 처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이 공산주의에 쉽싸임과 함께 제3세계라고 알려진 많은 나라에서 반 서방주의적 사상의 영향으로 외국 선교사를 배척하는 기운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대 교파라고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유주의신학으로 흐르고 있어서 복음주의자들은 큰 도전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복음주의자들은 자기방어 의식인 게토(Ghetto)정신 비슷한 침체에 빠져있는 듯, 18, 19세기에 있었던 대부흥 운동의 열기도 식어가고 있었다. 세계 선교면에서도 위축되고 있어서, 1910년에 에딘버러 대회에서 시작된 세계선교운동도 조직체인 IMC(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1961년에 WCC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면서 전도의 비전과 열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빌리 그래함 박사의 전도활동을 중심하여 전도의 열심을 되찾으려는 복음주의운동도 일어나고 있었다. 1966년 서베를린에서 모였던 세계 전도대회 (The World Congress on Evangelism)는 이런 면에서 크게 성공을 했다고 본다. 이런 후속운동이 아세아에서 (1968년의 싱가폴 대회), 남아메리카에서도(1969년, 보고타 대회), 유럽에서도(1970년, 프랑크푸르트 대회), 미국에서도(1973년, 시카고 대회)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운동은 더 거센 도전을 받게 되어 선교신학의 양극화 현상을 보게 하였다. 이런 현상은 1973년 방콕에서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이라는 주제로 모였던 WCC계통의 대회를 통하여 심화되었다. 세계 교회에서 복음주의의 소리는 작아지고 그들의 소리가 높아지며, 선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도 내용이 변질되는 듯, 신학적 혼돈을 가져왔다. 마침내 방콕대회는 서방선교의 모라토리움(Moratoism), 곧 해외선교를 보낼 필요도 없고 현재의 선교사도 철수하라고 제창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시점에서 복음주의자들은 1966년 베를린대회의 연속으로 1974년의 로잔대회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에서 유행되고 있는 선교의 모라토리움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많은 지역이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선교의 대 과제를 인식했던 것이다. 특히 선교에 있어서 전도와 사회참여 문제로 양극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야기된 신학적 혼돈(confusion)에서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모여 성경의 빛 아래서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며, 적응성 있는 선교방법을 모색하고, 온 교회가 이에 협력하여 세계복음화에 헌신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서 모였던 로잔대회이기에 그 역사적 의의가 컸다.


1.2. 제2차 세계복음화를 위한 로잔국제 대회 (마닐라 대회, 1989)

 

  로잔운동이  십여 년간 역사하여 오는 가운데 로잔운동의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로잔신학과 정신에 입각한 세계선교를 확산해 나가도록 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1986년에 6대륙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국제자문위원회가 모여 1989년에 제2차 로잔대회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고, 그 대회의 목적과 프로그램의 방향을 정하였다. 그 후 2년의 준비 끝에 로잔 2차 국제대회가 1989년 7월에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세계 각 곳에서 행하신 선교사역에 대한 찬양의 축제였다. 우리는 로잔 1차 대회에서 느꼈던 선교의 모라토리움의 물결이 완전히 역류하여 세계교회가, 특히 제3세계 교회들이 해외 선교를 활발히 행하고 있음을 찬양하게 되었다.

 

  이번 대회에는 수많은 나라와 교회(교파)에서 참가자들이 왔었다. 이는 곧 선교협력의 폭이 제 1차 대회보다 크게 넓어졌으며, 참가 교파들이 매우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48개 이상이나 되는 소그룹 토의가 있었다. 거기에서의 토의는 아주 다양했으며 깊이 있는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강연, 설교 등의 순서를 맡은 사람들의 배경이나 프로그램의 문화적 배경 등은 로잔 1차 대회 또는 어느 국제대회 때의 것보다 더욱 다양하고 넓어서, 마치 세계교회가 한곳에 모인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에는 카리스마적인 교회는 거의 제외되었으나 이번 대회에는 그들도 합류하였다. 이는 로잔운동이 온 세계 각 문화권 속에서 숨쉬며 역사하게끔 그 활동 저변이 세계적이 되었다고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이 대회에서는 또한 급격히 변화하는 오늘의 사회와 타종교, 이데올로기의 변천 상황과 그들의 도전도 나누고 검토하며, 그에 따르는 신학적인 정리도 하였다. 그래서 1974년의 로잔 언약의 기조에서 그를 보완하는 “마닐라 선언문 (The Manila Manifesto)"을 발표하였다. 참가자 일동은 세계선교를 보다 촉진하여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복음을 못 듣는 사람이 지구상에 한 명도 없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를 부르시어 온전한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게 하신다고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복음을 전파하기로 언약하며 대회를 마쳤다.


Ⅱ. 로잔운동의 성격과 과제


제 1차 로잔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함께 헌신할 것을 '언약'한 세계복음화 운동을 수행해 나가기 위하여 대륙별로 추천된 사람들을 중심하여 "로잔위원회 (The Lausanne Committee far World Evangelization)"를 구성함으로 지속적인 운동으로 이어나가게 되었다.

  로잔위원회는 어떤 권력구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적 선교사업을 추진하는 촉매제적 역할을 하는 조직체이다. 이는 하나의 '운동'(movement)이지, 교회들의 연합회 같이 가입한 회원들로 구성된 기구가 아닌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로잔은 WCC(세계 교회협의회)나 WEF(세계 복음주의협의회)와 구별된다. 로잔은 로잔언약의 정신과 신학적 입장에서 세계복음화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그 일에 서로 협력하고, 또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기회와 계기를 제공하는 일을 담당한다. 그러기에 참여자의 소속 교회나 기관의 다양함을 개의치 않는다.


이런 운동으로서, 로잔운동이 행하여 온 과제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 대회는 복음주의적 선교단체와 개인 및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세계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의논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가 담당하고 있는 주요한 임무이다.


  로잔은 큰 조직체라기 보다도 기능을 중심한 위원들이 각 분야와 각 교회의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복음주의 운동과 세계복음화에 촉매작용을 하게 하는데 그 관심이 있다. 그리하여 위원회 안에 신학연구위원회, 선교전략연구위원회, 홍보위원회 및 기도위원회 등을 두고 세계복음화에 관련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국제협의회를 주최하며, 또 여러 기관들과의 협력을 도모하여 오고 있다.

 

  둘째, 로잔대회는 서방선교회가 모라토리움을 제창하여 등한시하고 있던 해외선교, 특히 아직도 복음을 못 듣고 있는 27억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선교의 중요 과제를 인식케 하는데 크게 공헌을 했다. 이 선교를 위해 각 나라, 각기 다른 교회에서 온 대회 참석자 2700명이 "세계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계획을 세우고 함께 일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엄숙히 서약한 것은 선교의 모라토리움을 제창하는 WCC계통의 선교신학에 크나큰 도전이 되었다.

 

  이런 운동은 지금까지 타 문화권 선교에 피선교권이라고 생각해 오던 제 3세계 교회들의 참여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오히려 27억이라는 불신자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와 같은 제 3세계 교회의 제 일선 참여가 긴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게 되었다. 교회선교에 있어서 이런 획기적인 전환점을 로잔운동이 가져왔다는 데서 이 운동을 높이 평가해야할 것이다. 이런 영향하에 최근 제 3세계 교회들의 활발한 해외선교를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런 각성은 각성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 실행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 즉 이 세기 안에 성취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로잔운동에서는 "온 세계로 복음을 듣게 하자(Let the earth hear His voice)"라는 제호와 더불어, 제 2차 로잔 대회 이후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자”라는 주제 아래 선교전략 내지는 방법을 연구하여 세계복음화를 촉진케 하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

 

셋째, 로잔위원회가 또 중요시하며 시행해오고 있는 것은 기도 운동이다. 계절별로 나오는 선교에 대한 정보교환과 보급을 위한 기관지 World Evangelization과 함께 기도통신을 통하여 온 세계 성도들의 기도운동을 일으킴으로 세계복음화를 촉진시켜왔다. 1984년 한국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복음화를 위한 세계 기도 대성회"와 잇달아 개최된 지역별 기도성회는 로잔운동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  넷째, 로잔대회가 성취한 공헌은 세계복음화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정리한 것이다. 이 면에서 로잔은 선교운동의 선배들의 신학적 입장과의 연속성을 지니면서 신학적 기반을 정리하는데 그 성숙함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10년에 시작한 국제선교협의회(IMC) 운동 같은 것은 선교의 열심은 있었으나 그 운동을 뒷받침하고 보호할 분명한 신학적 기초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로잔에 모인 복음주의자들은 세계복음화를 위한 복음주의 운동에 기초가 되는 신학을 정리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1974년의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과 1989년의 마닐라 선언문(The Manila Manifestation) 에 표현되었다.


  이 로잔언약은 로잔운동의 신학적 기초와 복음주의자들의 협력의 기준과 공통분모가 되고 있다. '언약(Covenant)'이라고 표현했듯이, 이는 하나의 신학 선언문과는 달리,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이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이행치 못한 것에 대한 회개와 주님의 부르심에 새로운 헌신을 언약하는 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로잔위원회는 이 로잔언약에 나타난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현대선교에 연관된 중요한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함으로 신학 작업을 계속하여 오고 있다.

  로잔은 국제적으로 또는 지역적으로 여러 차례 신학협의회를 주최하여 그 결과를 책자로 출판하여 왔다. 그 중에서 1978년 버뮤다에서 있었던 '복음과 문화'에 대한 협의회와 1982년 미국 그랜드 래피즈에서 열렸던 '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 '에 관한 신학협의회, 1985년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되었던 ‘전도에서의 성령의 역할‘에 관한 신학 협의회 등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1980년에 '신도의 생활 생태(life style)'에 관하여, 1988년 1월에는 흥콩에서 '회심(conversion)'에 대한 신학협의회가 있었다.  이런 연속된 신학작업을 반영하여 로잔은 1989년의 마닐라 대회에서, 로잔 언약을 “마닐라 선언문 (The Manila Manifest)"으로 보완하기에 이르렀다.

 

*** 조종남 목사의 <로잔대회와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 발췌 ***


로잔언약


머리말 (Introduction)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150여개국으로부터 모여온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은 크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신과의 교제와 우리들 상호간에 교제를 가지게 하심을 기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행하시는 일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우리가 저질러온 갖가지의 실패를 통회하고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복음화의 과업에 도전을 받는다. 우리는 복음이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임을 믿으며 이 복음을 온 인류에게 선포하여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 분부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그의 은혜로 결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게 이 신앙과 이 결단을 확인하고 우리의 이 언약의 공포하려 한다.


하나님의 목적 (The purpose of God)

우리는 세계의 창조자이시며 주되신 영원한 한분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인한다. 하나님은 그의 뜻의 목적에 따라 만물을 통치하신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한 백성을 불러내시며 다시금 그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시어 그의 나라의 확장과 그리스도의 몸의 건설과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부름받은 백성들을 그의 종들과 증인이 되게 하신다.

우리는 왕왕 세상과 동화되든가 혹은 절연됨으로 우리의 소명을 부인하고 우리의 선교 사명에 실패하였음을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고백한다. 그러나 복음은 비록 질그릇에 담겼을지라도 귀중한 보화임을 기뻐하며 이 보화를 성령의 능력으로 널리 알게 하는 과업에 우리 자신을 새롭게 헌신하려고 한다.    (사40:28, 마28:19, 엡1:11, 행15:14, 요17:6, 18, 엡4:12, 고전5:10, 롬12:2, 고후4:7)


성경의 권위와 능력 (The authority and power of the Bible)

우리는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되었음과 그 참됨과 권위를 믿는다. 성경은 그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유일한 기록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있어서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유일의 정확 무오한 법칙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그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경말씀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불변하기 때문이다. 그 계시를 통하여 성령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성령은 어느 문화 속에 있든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깨우치사 이 진리를 그들의 눈으로 친히 새롭게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모양의 지혜를 온 교회에 더욱더 풍성하게 나타내신다. (딤후3:16, 벧후1:21, 요10:35, 사55:11, 고전1:21, 롬1:16, 마5:17, , 18, 유3, 엡1:17, 8,, 3:10, 18)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 (the uniqueness and universality of Christ)

우리는 전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구주도 오직 한분이요 복음도 오직 하나임을 확인한다. 우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이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의 불의로써 진리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여하한 형태의 혼합주의와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신다는 뜻에서 진행된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이를 거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신인(神人)으로서 죄인을 위한 유일한 대속물로서 자신을 주시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시다. 예수의 이름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은 없다. 죄로 인하여모든 사람이 멸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어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할 것을 원하신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구원의 기쁨을 거부하며 스스로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떠난다.

예수를 "세계의 구주"로 전한다 해서, 반드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모든 종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공한다고 보장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예수를 "세계의 구주"로 전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죄인들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며 마음을 다한 회개와 신앙에 의한 인격적 헌신으로 예수를 구주로 맞이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다른 이름위에 높임을 받아 왔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모든 입이 그를 주로서 고백하게 되는 날을 간절히 고대한다.       (갈1: 6-9, 롬1:8-32, 딤전2:5, 6, 행4:12, 요3:16-19, 벧후3:9. 살후1:7-9, 요4:42, 마11:28, 엡1:20, 21, 빌2:9 -11)


전도의 본질 (The nature of evangelism)

전도한다는 것은 기쁜 소식을 널리 퍼뜨리는 것인데, 기쁜 소식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나시어 통치하시는 주로서 그는 지금도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사죄와 성령의 자유케 하시는 은사를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전도에 있어서 세계 속의 그리스도인의 현존은 불가결한 것이며, 또한 이해하기 위하여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도 없는 수는 없다. 그러나 전도 그 자체는 역사적 성서적 그리스도를 구주요 주로서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개인적으로 와서 하나님과 화목함을 얻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복음의 초대를 함에 있어 제자된 값을 치러야 한다는 일을 감출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의 새 공동체에 속하였음을 분명히 하도록 부르신다. 전도의 결과는 그리스도께의 순종, 그의 교회와의 협력, 세상 안에서의 책임있는 봉사를 포함한다.   (고전 15:3, 4, 행2:32 -39, 요20:21, 고전1:23, 고후4:5, 5:11, 20, 눅14:25-33, 막8:34, 행2:40, 478, 막10:43-45)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자이신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권념에 참여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인종, 종교, 피부빛, 문화, 계급, 성 또는 연령의 구별없이 모든 사람이 타고난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은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된다. 이 점을 우리는 등한시하여 왔고, 또는 왕왕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데 대하여 참회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사회 행동이 곧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가지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는 다같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교리, 우리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종류의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무서워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중생함을 받는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는 것이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17:26, 31, 창18:35, 사1:17, 시465:7, 창1:26, 27, 약3:9, 레19:18, 눅6:27, 35, 약2:14-26, 요3:3, 5, 마5:20, 6:33, 고후3:18, 약2:20)


교회와 전도 (The church and evangelism)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받은 백성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을 우리는 확인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이 세상으로 깊고도 희생적인 침투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적 "울타리"를 트고 넘어서 비기독교 사회에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교회가 희생적으로 해야 할 일 가운데 전도는 최우선적인 것이다.

세계 전도는 전체 교회로 하여금 전체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함을 요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 목적을 바로 중심에 서 있으며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가 지정하신 수단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설교하는 교회는 스스로 십자가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

교회가 만일 복음을 배반하든가, 하나님을 향한 산 믿음이 없다든가,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든가, 사업 추진과 재정 등 모든 일에 있어서의 철저한 정직성이 결여될 때 교회는 오히려 전도의 장애물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문화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체제들이나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요17:18, 20:21, 마28:19, 20, 행1:8, 20:27, 엡1:9, 10, 3:9-11, 갈6:14, 17, 고후 6:3,4, 딤후2:19-21, 빌1:27)


전도를 위한 협력 (Cooperation in evangelism)

교회가 진리 안에서 가견적 일체성을 이룩하는 일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우리는 확인한다. 전도는 또한 우리를 하나가 되도록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일치가 우리가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 무너뜨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됨은 우리의 증거를 더욱 힘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적 일치가 여러 가지 모양을 띨 수가 있고 또 그것이 반드시 전도를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란 것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성서적 신앙을 함께하는 우리들은 교제와 일과 증거에 있어서 긴밀하게 일치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증거가 때로는 죄악된 개인주의와 불필요한 중첩으로 인하여 저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한다. 우리는 진리와 에배와 거룩함과 선교에 있어서 좀더 깊은 일치를 추구할 것을 약속한다. 교회의 선교를 촉진하기 위해서, 전략적 계획을 위해서, 상호간의 격려를 위해서 그리고 자원과 경험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 지역적이며 기능적인 협력을 발전시킬 것을 우리는 촉구한다.   (요13:35, 17:21, 23, 엡4: 3, 4, 빌1: 27요17:11-23)


전도와 문화 (Evangelism and culture)

세계 전도 전략의 개발에는 대담한 개척적 방법이 요청된다. 하나님 아래서 세계 전도의 결과로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 박히고 동시에 각각의 문화에 밀접히 관련된 여러 교회들이 일어날 것이다. 문화는 항상 성경을 표준으로 해서 검토되고 판단받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인고로 인간 문화의 어떤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선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 전부가 죄로 물들었고 어떤 것은 악마적이다. 복음은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모든 문화를 그 자체의 진리와 정의를 표준으로 해서 평가하고 모든 문화에 있어서 도덕적 절대성을 주장한다.

선교는 이제까지 복음과 함께 이질적 문화를 수술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하여 교회는 왕왕 성경에 매이기보다 문화에 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도의 전도자는 겸손하게 자기를 전체로서 비어버리기를 힘써야 한다. 다만 그의 인격의 가장 진정한 것만 남겨 가져서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문화는 문화를 변형(변혁)시키고 풍요하게 만들기에 힘쓰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   (막7:8,9,13, 창:21, 22, 고전 9:19-23, 빌2:5-7, 고후4:5)


자유와 핍박 (Freedom and persecution)

모든 정부는 교회가 간섭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 그리스도를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평화와 정의와 자유의 상태를 보장해야 할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하나님의 뜻으르 따라, 그리고 유엔 인권선언에 규정한 바와 같이 종교를 믿으며 전파할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또한 부당하게 투옥된 사람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고난받는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우리는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기도하며 일할 것을 약속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운명에 의하여 유발되는 협박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매 우리는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불의에 항거하며 복음에 충성하기를 힘 쓸 것이다. 핍박이 없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딤전1:1-4, 행4:19, 5:2, 골3:24, 히13:1-3, 눅4:18, 갈5:11, 6:12, 마5:10-12, 요15:18-21)


맺는말 (Conclusion)

그러므로 이와같은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결심에 비추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또 우리 상호간에 전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계획하고, 일할 것을 엄숙히 언약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 할 것을 호소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이 언약에 충실하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기를 기도한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