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성숙의 불씨 713호 2020.12.8
한 지식인의 의미 있는 독설
미국 대통령 선거 직전인 지난 10월 31일 자 미국 일간지 에 세계적인 언어학자요 철학자인 촘스키(N. Chomsky)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다. 거기서 그는 트럼프 미 대통령을 "인류역사상 최악의 범죄자(the worst criminal in human history)"라고 정죄했다. 촘스키는 러시아에서 도피하여 미국에 이민한 유대인 가정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트럼프가 더 악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히틀러는 유대인만 말살하려고 했고, 스탈린과 모택동은 일부 반동분자들만 숙청했지만, 트럼프는 인류 전체를 종말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미국이 그의 주도로 파리 협약에서 탈퇴했고, 지구온난화를 가짜이론이라 주장하며 석탄사용을 장려하는 등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것이 바로 인류 멸절을 가져오는 만행이란 것이다.
촘스키는 학자일 뿐 아니라 평소에도 정치, 외교, 사회 등의 여러 문제에 날카로운 비평을 자주 하는 지식인으로 알려졌다. 그래도 전 세계에 알려진 지식인이 어떤 사람을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더 악한 "인류역사상 최악의 범죄자"라고 지적한 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물론 트럼프에게 투표하지 말라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은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지구온난화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경고하기 위함일 것이다.
최근까지 우리는 학자란 사실을 밝혀내고 설명하는 것에 전념해야지, 현실 세계의 다른 분야에 간섭하거나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론(theory)이란 장사꾼이나 재주꾼의 업무가 아니라 이해에 무관심한 "관객(theoros)"의 관할이란 피타고라스의 전통에 잘 순응해 온 것이다. 아직도 상당수 학자는 구체적인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구경꾼" 행세를 하고 있다.
물론 그런 입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논리학, 수학, 이론물리학, 언어학 같은 순수학문 분야에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같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오늘날 아무도 구경꾼이 될 수 없고, 특별히 학자, 지식인은 그래서는 안 된다. 이론적 추론에 약한 사람들은 지금 피부에 와 닿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당장 이익이 되는 것, 편리한 것, 즐거운 것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거기에 몰두하지만, 그런 것이 가져올 부정적인 결과들은 안개 속에 묻혀 있는 것처럼 희미해서 쉽게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논리와 인과관계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자들에게는 이론적 추론의 결과가 눈으로 보듯 확실해야 한다. 말하자면 칸트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지적 직관(intellectual intuition)" 같은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촘스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인류의 종말은 눈에 보듯 환하기 때문에 기후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트럼프를 인류 역사에서 최악의 범죄자라 한 것이다.
온실가스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촘스키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모르지만, 이론적 추론의 결과가 너무 확실하면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동물 권리를 주장하는 싱어(P. Singer)가 육식을 거부하거나, 러셀(B. Russell)이 체포되어 수감되면서도 핵무기 개발을 반대한 것이 바로 그런 지적 확신을 반영한다. 기후변화와 관계해서도 실제로 유럽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작은 자동차를 몰거나 아예 자동차를 갖지 않는 사람이 많다. 온실가스 증가 문제에 대해서 일반 시민들보다 훨씬 더 민감하고 그 위험을 앞장서서 경고할 뿐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들의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빨리 증가하는 나라이면서, 재생에너지 생산 순위는 조사대상 44개국 가운데 40번째고 그 비율은 4.8%로 전체평균 26.6%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너무 조용하다. 기후변화의 위험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현실에 얽혀있는 정치인들보다도 더 둔감한 것 같다. 그래도 이명박정부는 "녹색산업", 현 정부는 "그린뉴딜" 등 슬로건이라도 내걸었는데, 한국의 학자들과 학계는 그 정도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촘스키처럼 인류 종말을 경고하는 학자도 눈에 띄지 않고, 유럽의 지식인들처럼 행동으로 에너지 절약을 실천한다는 소문도 없다.
그동안 한국 지식인들은 민주화, 인권, 평등 같은 중요한 문제들에 목소리를 내어 왔고, 어느 정도 열매도 거두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람들의 몸에 당장 와 닿는 문제들로 일반인들에게도 절실하다. 꼭 지식인들이 앞장서야 할 이유는 없다. 학생, 종교인, 의식이 깨인 일반 시민들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기후변화 문제는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식인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당장 눈에 띄거나 몸에 와 닿지 않는 추론의 결론이기 때문이고, 그 결과는 인류 종말이란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든 지식인은 적어도 기후 문제의 위험만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정부와 시민들에게 경고하고, 구체적으로 에너지 절약을 실천함으로 그 위험의 절실함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글쓴이 / 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부산 고신대 석좌교수
·전 동덕여대 총장
·전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전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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