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두 구루(guru)가 만났다. 최초로 '사회적기업가'란 개념을 만들고, 전 세계 사회적기업가들의 정신적 아버지인 글로벌 비영리 조직 '아쇼카'의 창업자 빌 드레이턴(Bill Drayton·74). 그리고 노자 철학 권위자이자, 한국의 인문·과학·예술 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의 초대 원장인 최진석(58) 서강대 철학과 교수. 지난 6일, 미국 버지니아주 아쇼카 본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언어는 달랐지만 "이제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며 입을 모았다. 빌 드레이턴은 이런 사람들을 '체인지메이커'라고 명명했고, 최진석 교수는 '창의(創意) 전사'라 불렀다. 파란 눈의 70대 서양인과, 하얀 스포츠머리의 50대 동양인은 다른 길을 걸어온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2시간 30분가량 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시대에 '체인지메이커' 인재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새 게임엔 새 룰(rule)이 필요하다
빌 드레이턴(이하 빌)=반복의 시대에서 변화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규칙을 잘 따르면 좋은 인재가 될 수 있었지만, 변화가 가속된 지금은 규칙이 점점 소용없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조직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협업하는 것도 힘들다. 만약 당신이 치과 의사라고 생각해보자. 기술이 발전하고 환자들에게 권력이 이동하는 흐름을 주시해야 한다. 변화 패턴을 보고, 발맞춰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다.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체인지메이커(Everyone a changemaker)'가 되지 않으면, 이 게임에 참여조차 할 수 없다. 변화에 기여하지 않으면, 즉 체인지메이커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힘들다.
최진석(이하 최)=근대까지는 나보다 '우리'가 강조됐다. 개인보다 집단이 더 높은 위치를 점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게임의 룰이 변했다. 자발성을 가진 개인들의 연합으로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사회와 더 깊은 교류를 한다. 자신이 주인으로 사는 '개방적 자아'는 사회와 충돌을 빚을 것처럼 보이지만,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을 읽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보시킨다. 드레이턴씨는 이런 사람들을 '체인지메이커'라고 부르는 것 같고, 나는 이들을 '독립적 주체'라고 부른다. 건명원에서 훈련하는 인재상인 '창의 인재'와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인 것 같다.
빌 드레이턴은 1980년, '사회적기업가(Social Entrepreneur)'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가 말하는 사회적기업가는 변화를 창조하되, 기존의 시스템과 방식 등 '문제의 뿌리'를 없애거나 '사회 전체의 프레임'을 바꾼 기업가를 말한다. 빌 드레이턴 덕분에 많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최 교수는 "체인지메이커란 단어도 직접 만든 것이냐"고 질문했다.
빌=정확히 언제 만들었는지도 말해줄 수 있다(웃음). 1981년, 인도 봄베이 사무실에 앉아서 아쇼카의 첫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제목이 필요했다. 당시에 나만 해도 할머니한테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체인지메이커'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정리하자면 사회적기업가는 모두 체인지메이커지만, 체인지메이커라고 모두 사회적기업가는 아니다. 어떤 분야의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기업가는 '소수'다. 하지만 체인지메이커는 모두에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이다. 이제는 '체인지메이커'란 개념이 확산될 때다. 건강하고 행복한 개인이 되려면 각자가 체인지메이커가 되어야 하고, 어떤 조직이든 살아남으려면 구성원들이 체인지메이커가 돼야 한다. 아쇼카 내부적으로만 보면 40년 가까이 된 개념이지만,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개념이 된 것은 불과 3~4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최=한국이 체인지메이커 사회가 되면, 세계에 더 크게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은 지난 몇십년간 어린이들을 체인지메이커로 길러내는 데 소홀했던 업보를 지금 치르고 있다. 학교 교육도 큰 몫을 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대나무를 이용해서 말을 만들어 타고 노는 '죽마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이의 상상력과 체인지메이커로서 활동성이 잘 발휘된 놀이다. 하지만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은 '그 죽마는 말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학교는 이미 정해진 것만 가르치고,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지 않는 곳이 됐다. 나 역시 체인지메이커를 양성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은데,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최진석 교수는 2015년 '시대적 반역자'를 키우겠다며 동료 교수 7명과 함께 대학교 밖 인재 양성소인 '건명원'을 세웠다. 매년 초 30여명을 압박 면접으로 선발해 철학, 과학, 예술 등 인문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학생들과 매달 한 번 걷기 명상 수업을 진행하며, 사색 과정을 몸으로 겪는 것도 특징적이다. 학비는 무료이며, 졸업생에 한 해 한 달 동안 세계 여행도 전액 지원한 적이 있다. 지난 2일까지 모집한 3기 모집 요강에는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학교의 이름도 노출되지 않아야 하며, 종교나 성별, 그리고 사진까지 붙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서류 전형에서 답해야 하는 논제는 단 2가지. '첫째, 지금까지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신의 삶을 분석, 평가하라. 둘째, 대한민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인은 어떤 역할을 하려고 하는지 기술하라.' 체인지메이커 양성에 대한 최 교수의 고민이 엿보인다.
빌=한국에만 있는 상황은 아니다. 미국의 중고등학교의 교장들과 부모들 또한 아이들을 체인지메이커로 키우는 것이 결국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이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역량은 과거와는 판이하다. 인지적 공감 능력, 섬세한 팀워크, 리더십, 체인지메이킹 그 자체이다. 이것들은 책을 읽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을 해야 배울 수 있다. 150년 전에는 모든 아이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모든 부모, 교장, 아이들이 체인지메이커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 시급하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 둘 다 동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당신의 전략은 무엇인가?
최=나에게 "당신은 어떻게 할래?" 묻는 것으로 이해하겠다(웃음). 물론 나도 그 심각성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깨달았지만, 내 몸을 움직여 행동에 나선 지는 이제 3~4년밖에 되지 않았다. 일단 '건명원'이라는 기관을 설립해서 연 30명 정도를 교육해서 배출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이것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확산시킬 것인가에 있다.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을까.
◇임팩트 있는 변화 원한다면, 주짓수 파트너를 찾아라
빌=누가 잠재적인 '주짓수 파트너'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주짓수는 관절꺾기나 조르기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무술로, 약자가 강자를 제압할 수 있는 운동 중 하나이며, 파트너와 함께 기술을 익힌다). 아쇼카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이해관계가 걸린 강력한 집단들을 움직여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교사 노조(teachers' unions)가 있다. 지금까지 노조는 교육 실패에 대한 원망의 대상이었다. 교사들 스스로 노조에 가입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사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으면, 아이들까지 피해를 본다. 이들도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한다. 만약 교사 노조와 손을 잡게 되면 매우 강력한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이다.
아쇼카에는 '유스 벤처(Youth Venture)' 프로그램이 있다. 모든 청소년이 체인지메이커가 되는 것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공감 능력, 협력적 리더십, 팀워크, 문제 해결 능력 등을 학습하게 된다. 지난해 아쇼카한국은 50개 중고교 교사들과 협력해 500여명의 학생에게 유스 벤처 프로그램을 확산했다. 유스 벤처 프로그램을 통해 서울 창덕여중에는 서랍 속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서랍 없는 책상'이 도입됐고, 경기 이천의 양정여고생 3명은 학교 앞 분식집 살리기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도 했다. 빌 드레이턴은 "청소년들이 직접 행동을 해보면서 자신이 내면에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된다"며 유스 벤처 프로그램의 의미를 설명했다.
최=한국에서도 교육은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라는 인식이 있다. 학생들은 자기 신뢰감이 낮고, 행복하지 않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이다. 사실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다. 나도 이 문제에 직접 접근할 엄두를 내지는 못하고, 기존 교육 시스템과 별개로 독립된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나 역시 주짓수 파트너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빌=또 다른 중요한 파트너는 부모다. 부모들이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자녀가 어떤 역량을 갖춰야 할지 알 수 있다. 만약 부모들이 다른 아이들의 체인지메이커 성장 과정을 듣기만 하면, 당연히 자신의 아들딸도 그 길을 걷기를 원할 것이다. 매우 단순하고도 강력한 방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쇼카는 기업의 임직원들을 중요한 변화 파트너로 보고 있다. 아쇼카는 ‘유어 키즈(Your Kids)’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 임직원들에게 자녀들이 체인지메이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 방법을 알려준다. 일종의 자녀 교육법을 가이드해주는 것. 아이들은 부모의 코칭을 받아 문제가 생기면 팀을 짜고,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의 성장을 목격하고, 이 과정을 회사 사람들에게 공유한다. 이렇게 기업 내부뿐만 아니라 다른 지사에 있는 사람들, 커뮤니티에서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부모, 기업, 대학 등과 협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아쇼카 본부 사무실 입구에는 ‘공익을 위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염성이 있다(Being a changemaker for the good is very contagious)’는 빌 드레이턴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그의 나이는 올해로 74세. 30대 후반에 아쇼카를 설립해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일이 바빠서인지, 일이 좋아서인지, 여전히 그는 싱글(single)이다. 도대체 그 원동력이 무엇일까.
최=학교에서 교수를 19년 했는데, 자기가 실천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말하는 교육은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쇼카는 30년 넘게 체인지메이커 양성 운동을 해왔는데, 어떻게 본인이 체인지메이커로서 역할을 하고 있나. 오랜 기간 운동을 이어온 ‘비결’이 궁금하다.
빌=아쇼카 직원들은 모두 윤리적 소양을 갖추고,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쇼카 펠로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쇼카와 함께하는 비즈니스 리더인 E2(10억 이상 기부하는 고액 기부자) 그룹 분들 또한 훌륭하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얼마나 환상적인 커뮤니티인가. 나는 그들과 매일 함께하는 것을 선물처럼 여긴다. 또 다른 이유는, 지금은 역사적으로 전환기라는 점이다. 이제는 모두가 평등하고, 힘을 가진 존재이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를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있으면 한번 줘봐. 내가 풀어보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또한 이런 시도들이 지지를 받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최=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비결 중 하나라고 이해하겠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일 속에서 성장도 없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더욱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용기가 필요하다. 한국 교육은 이 세계에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문제다. 오히려 아이들 스스로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게 되면서 체인지메이커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해보는 것이 체인지메이커가 되는 선결 조건이다.
빌=그것은 모든 탁월함(excellence)의 선결 조건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꿈꾸는 변화를 직접 만들어보고, 이 세상에 기여했을 때 맛보는 순수한 기쁨(sheer pleasure)을 통해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느끼는 흥분과 열정은 전염될 수밖에 없다.
■ 빌 드레이턴
―하버드 인문학 학사 졸업, 옥스퍼드대 밸리얼칼리지 석사 졸업
―예일대 로스쿨 졸업
―맥킨지 컴퍼니 컨설턴트
―지미 카터 정부 환경 개혁기구 보좌관, 탄소배출권 개념 도입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객원 교수
미국 최고 지도자 25인(2005년 US 뉴스앤드월드리포트)
現 아쇼카 창업자
■최진석 교수
―서강대 철학과 학사, 석사 졸업
―베이징대 철학 박사
―하버드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캐나다 토론토대 동아시아학과 방문 교수
―現 서강대 철학과 교수
―現 건명원 원장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 〈인간이 그리는 무늬〉,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등
☞아소카는
아쇼카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본부를 둔 사회적 기업가를 지원하는 비영리 조직으로, 지난 30여년 동안 88국에서 ‘아쇼카 펠로(fellow)’ 3300여명을 선정해 지원해왔다.
20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총재, 2014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동 인권 운동가 카일라시 사티아르티(Kailash Satyarthi)씨를 비롯해 미국 비영리 교육봉사 단체 ‘티치포아메리카(Teach For America)’의 웬디 콥 설립자가 대표적이다.
아쇼카는 평균 6개월에서 1년여에 걸친 5단계의 선발 과정을 통해 펠로를 선정하고, 이들에게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한다. 재정 지원이 필요한 펠로에겐 선정 후 3년간 개인 생활비(1년 평균 5000만원)를 제공한다. 아쇼카 한국은 2013년 3월 출범 이후,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명성진 세상을품은아이들 대표, 송한나 리버티인노스코리아(LiNK) 대표 등 총 10명의 펠로를 배출했다.
☞건명원은
건명원은 2015년 중소기업인 두양의 오정택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만든 인재 양성소다. 본인의 가회동 한옥을 배움터로 내놓고, 우리나라 인문·과학·예술 분야 권위자들을 강사로 모셨다.
현재 수업은 매주 수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전에 진행되며, 한 달에 한 번 실시하는 걷기 명상 수업은 토요일 종일 진행한다. ‘훈고에 갇힌 우리 사회에 창의의 기풍을 일으킬 미래형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 목표인 건명원은 기존의 교양 차원의 인문학 강연과는 다르다.
원장인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비롯해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김개천 국민대 실내디자인학과 교수, 김대식 카이스트 전자전기공학과 교수, 정하웅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등 각기 다른 학교의 인문학, 자연과학계 권위자들이 건명원을 이끌어가고 있다. 매년 초 30~40명을 선발하며, 학비는 무료이다.
기고자 : 김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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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7.02.28 / 기타 D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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