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의 집단안보론
1950년의 한국전쟁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군이 참전한 전쟁이다. 그때, 북한과 소련과 중공군의 남침에 대항하여 유엔군이 함께 싸우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당시에 전투 병력을 파견한 16개 참전국에는 에티오피아도 포함된다. 에티오피아 황실 근위대가 한국전에서 남긴 전적은 실로 놀랍다. 1951년 4월부터 1956년 4월까지 5년 동안 강뉴부대 장병 총 연인원 6,037명이 파병되었고, 유엔군 일원으로서 가장 치열한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 승리했으며, 전사자 124명, 부상자 536명, 포로 0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전투에 투입되어 완벽에 가까운 전술과 뛰어난 용맹함을 발휘하였으며, 특히 인해전술로 밀어닥친 중공군에게 단 한 번도 승리를 안겨주지 않았을 만큼 백병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들은 두 가지 기록을 남겼다. 패한 전투가 하나도 없었고, 포로가 된 병사가 한 명도 없었다. 훈련된 체력과 전투력 외에도 군인으로서의 강인한 정신력과 투철한 사명감의 증거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한 가지를 우리는 기억한다. 에티오피아군의 6.25 참전은, 실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굳은 신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6.25 남침에 대항하여 유엔군이 결성된 것 자체도 유엔 회원국을상대로 그가 펼친 리더십과 열렬한 설득에 힘입어서 가능했다. 이 '설득'의 명분이 바로 '집단안보론(Collective Security)'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일개 약소국에 대한 공산 진영의 침략에 맞서 자유진영은 당연히 '집단안보' 정신을 행동에 옮겨야 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약소국은 침략자의 희생 제물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참전국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중 절대다수가 (룩셈부르크,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뉴질랜드, 그리스, 콜롬비아, 네덜란드, 태국, 필리핀 등등) 강대국이기보다는 오히려 약소국들이다. 그런데 황제는 왜 그랬을까? 왜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 국가를 위해 저 멀리 아프리카 국가의 황제가 유엔 회원국들을 설득하여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을까? 일찍부터 기독교 국가 전통을 지켜 온 에티오피아는 수단, 소말리아, 그리고 홍해 건너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종교 및 지정학적 이유로 갈등과 전쟁을 겪으며 자국의 존립을 지켜내야 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홍해 연안을 끼고 있는 에리트레아 지역에 대한 주변국들의 관심이었다.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어 홍해 연안의 경제적, 전략적 중요도가 높아지자, 이 지역에 서구 열강들의 관심도 집중되었으며, 특히 이탈리아의 정치적, 군사적 개입과 본격적인 식민지화 전략은 끈질기게 에티오피아에 집중되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과 점령은 크게 두 차례였다. 한번은 1890년대였고, 또 한 번은 1930년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에 국제연맹이 만들어졌고, 에티오피아도 1923년에 연맹에 가입했다. 1935년에 에티오피아가 다시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게 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무고한 양민과 아동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독가스를 살포하며 침공해온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만행과 정복욕을 지적하고 연맹의 도움을 호소했지만, 52개 회원국들은 이탈리아의 국제법 위반을 결의했을 뿐, 아무런 조처도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한국을 위해 '집단안보'를 솔선수범한 에티오피아는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은 국제연맹 '집단안보'의 혜택이 절실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혜택을 받지 못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쓰라린 체험 때문에,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6.25가 터지자마자 곧 참전을 결정하고 다른 UN 회원국들에게도 '집단안보' 실천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던 것이다. 황제의 재위 기간은 40년이 넘도록 지속될 수 있었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서 기근과 실정 및 경제적 몰락 등 난관을 겪으면서 통치권을 상실하고 좌익 군사정권에 의해 1974년에 폐위된다. 새 정권은 군부 독재 체제로서 소련과 우호조약을 맺고 집단농장제도 등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추진하면서 13년 동안 유지된 후, 1987년에 민정 체제로 정권을 이양했지만, 과거 셀라시에 황제 시대의 국가적 위용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에티오피아 지도를 한 번 보시라. 바다로 나갈 해안 접근로는 모두 다른 나라에 점령당하여 내륙에 갇혀버린 나라, 그래서 우리나라로 파병할 군대를 지부티 항에서 출항시키기 위해서도 별도로 타국에 통과세를 내고서야 항구로 나갈 수 있는 나라, 바로 이런 것이 소위 말하는 약소국의 운명 아닌가? 저 멀리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에티오피아, 그리고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 국가 대한민국이 맺은 인연을 뒤돌아보면서 던지는 질문이 있다. 매우 일반적인 물음이다. 미래를 위해서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그래서 한반도와 우리나라를 염두에 두면서 묻게 된다. 6.25 전쟁은 이미 67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한반도와 국제 정세는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 지긋지긋한 전쟁 이야기는 그만 하고 잊어도 괜찮지 않은가? 과거는 과거로 돌리고 미래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 에티오피아 역시 과거 셀라시에 황제의 에티오피아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가 제창한 '집단안보'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은가? 군사적으로 약소국이며, 평화를 원하며, 이웃 나라와 전쟁을 일으킬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나라지만, 그러나 이웃 나라에게 약점을 보인다면, 그래서 만에 하나 우리를 침략하면 얻을 것이 있으리라는 유혹과 판단 미스에 빠지게 해도 좋을까? 반면에 평화가 소중한 만큼 평화를 지켜낼 전략도 있어야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왜 약소국만이 아니고 소위 말하는 강대국들도 집단안보 전략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한 가지 물음이 여기에 더 추가된다. 셀라시에 황제는 자국의 방어를 위한 집단안보를 설파했지만, 공격적 집단 연대도 항상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결국 문제는 '집단안보' 자체가 아니라,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 정당성 여부가 검증되어야 하지 않는가? 인류 역사가 전쟁의 역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 윤리학도 '전쟁윤리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