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시아/코커서스 3국

[스크랩]아르메니아를 떠나며

양선재 2014. 8. 17. 20:02

아르메니아를 떠나며

 희망봉402014.08.14 20:49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의 최후의 만찬은 예레반에서도 손꼽히는 오래된 식당에서 먹습니다.

우리의 만찬을 더욱 뜻깊게 해주기 위해 6인조의 전속악단이 연주를 해줍니다. 그중 한 명은 여자인데 가수입니다.

오늘 만찬의 메인 메뉴는 케밥입니다.구운 고기를 커다랗게 꼬치에 꽂아 갖고 나와서 테이블에서 종업원이 썰어 줍니다.

고기는 무한 리필입니다. 양고기 소고기 돼지고기를 손님 취향대로 썰어주는데 다 먹을만 하면 얼른 와서 또 썰어서 접시에 얹어 줍니다.

"그만!" 소리를 외쳐야 그만 둡니다.

푸짐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예레반의 번화가인 공화국 광장으로 걸어서 이동합니다.

길거리에서도 케밥은 인기입니다.

예레반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멋진 카페에서 저녁 한 때를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늦은 시간임에도 옷가게는 환히 불을 켜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습니다.역시 청바지가 대세인 모양입니다.

실내 카페인데도 완전히 오픈되어 야외에 앉아 있는 기분들입니다.

공화국 광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완전히 불야성입니다.

공화국광장에는 커다란 연못과 분수가 있는데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는 분수는 주변건물들의 조명과 어울려 화려한 모습을 연출합니다.

분수는 크지도 않고 물줄기가 다양하지 않지만 주변의 건물들의 조명이 화려해서 장관을 이룹니다.

공화국 광장 주변의 건물들은 대부분 정부청사나 박물관같은 공공건물인데 밤이 되면 일제히 조명을 밝혀 광장을 화려하게 수놓습니다.

박물관앞 계단에는 수 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분수쇼와 야경을 즐기고 있습니다.

대형스피커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와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분수를 가동하고 건물에 조명을 밝히고 음악을 틀어주는데도 전기료 등 적지 않은 비용이 들텐데 그것은 누가 부담하는 것일까?

모두를 예레반시에서 부담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레반 시민들은 밤에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수십개의 채널이 있는 TV가 있는 것이 아니라 채널이 두 세개 뿐인 방송국이 있을 뿐이고( 외국채널도 두 세개정도)

넉넉지 않은 경제형편에 카페에 가서 술을 마실 여유도 없고 ..이런 시민들을 위하여 시당국에서 광장에 즐길거리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죠.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서 관광객이 더 많이 온다면 그것은 부수적인 효과인 것이고 어디까지나 시민들을 위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벤치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튿날 아침- 드디어 예레반을 떠나는 날입니다.아쉬운 마음에 캐스케이드를 다시 한 번 둘러봅니다.

캐스케이드 아래에 있는 공원의 끝에는 커다란 석상이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24년에 현대적인 예레반의 도시를 설계한 알렉산더 타마니안 이라는 건축가입니다.

그의 도시설계에 캐스케이드도 들어 있었고 공화국 광장도 들어 있었답니다.

인구 20만명을 목표로한 도시로서 방사선형 도로계획이 포함되었답니다,그러나 지금은 인구가 100만이 넘어 포화상태가 되었지요.

 

캐스케이드에 작별을 고합니다.

예레반을 떠나기 전에 두어곳 더 들러볼 곳이 있답니다.

이곳은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기념물(Armenian Genocide Memorial)입니다.

20세기초에 아르메니아 인들에게는 악몽같은 대학살극이 벌어졌습니다.

한때 코커서스 전체는 물론 흑해연안까지를 지배하던 왕국을 이룩했던 아르메니아 인들인만큼 오스만제국이 아르메니아를 합병할 당시에도

아르메니아 인들은 코커서스는 물론 아나톨리아 지방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450년 오스만터키가 아르메니아를 합병하고 코커서스와 아나톨리아 지방의 패자가 된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은 고난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터키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르메니아 인들은 눈의 가시였습니다.

교육열이 높고 부지런해서 열심히 일하는 아르메니아 인들이 이슬람교도들보다 더 잘사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지요.

세금이나 교육과 취업의 기회 등에서 많은 차별을 받으면서도 아르메니아 인들은 굳세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다가 1914년에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오스만터키는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때 터키의 군주는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 인들이 같은 기독교 국가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여

인종청소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1915년 4월24일을 기해서 수만명의 아르메니아 지식인들이 체포되고 처형당하였습니다.

체포를 면한 일반인들은 집을 빼앗기고 죽음의 행진으로 내 몰렸습니다. 이른바 아르메니아 인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지요.

충분한 물과 음식물을 공급받지 못한 채 시리아의 사막지대로 내쫓겼던 것입니다.

신발조차 없어서 맨발로 걸어가던 그들은 가는 도중에 얼어죽고 굶어죽고 터키군의 총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터키영내에 200만명가량의 아르메니아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학살이 끝난뒤에는 39만명으로 감소하였습니다.

아르메니아 정부에서는 최소 60만명에서 150만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 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면서

터키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터키정부는 대학살이란 어불성설이고 전쟁중에 불가피하게 피난하던 사람들이 일부 사망한 것이라고 우깁니다.

또 지금의 터키는 오스만 터키와는 다른 나라이고 전쟁도 오스만 터키가 한 것이기에 현재의 터키와는 관계가 없다고 억지주장을 합니다.

터키내에서 대학살이란 단어는 금지어랍니다. 터키가 미국과 독일 등 NATO국가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기때문에

서방국가중에서 어느 나라도 아르메니아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고 있으나 대학살의 진상은 이곳저곳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아르메니아 대학살 기념물은 아르메니아 이외에도 15개 나라에 세워져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학살 기념물은 여러 개의 흑색 돌기둥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안쪽에는 영원의 불꽃이 타고 있습니다.

학살 기념물 주위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공원에는 외국의 국가원수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기념식수를 한 나무들이 있습니다.

이 구상나무는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기념식수한 것입니다.

교황의 기념식수 표지입니다

."오 주여 이 나라의 아들과 딸들이 어떤 고생을 해왔는지 기억해 주시고 아르메니아에 당신의 축복을 내려 주소서.교황 요한 바오르 2세"

 

아르메니아 학살기념물을 보고 시내로 오는 길에 흐라즈단 스타디움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흐라즈단 스타디움은 예레반 최대의 종합경기장입니다. 예레반 시민들이 좋아하는 축구경기가 자주 열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흐라즈단(Hrazdan)스타디움

이 스타디움 근처에 시장이 있다기에 구경 좀 하고 가자고 했습니다.아르메니아 떠나기 전에 체리를 실컷 먹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장에는 과일가게는 없고 온통 옷가지와 신발 등의 잡화만 팔고 있었습니다. 물건가격이 싼지 현지인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이번 코커서스 여행중에는 한식을 한 번도 못먹었습니다. 한식당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로 한국사람 입맛에 맞게 요리를 하는 중국집이 있어서 마지막 오찬은 중국식으로 한답니다.노북경(老北京)이란 중국집입니다.

음식점 인테리어가 전형적인 중국집 스타일입니다.

나오는 음식들도 한국에서 먹던 중국요리와 비슷합니다.

 

 

 

 

 

예레반 공항입니다. 브라질 월드컵을 앞둔 시기여서인지 축구유니폼을 입은 마네킹이 손님을 작별합니다.

아르메니아를 떠나면서 저는 아르메니아와 우리나라를 비교해 보게 됩니다.비슷한 점을 많이 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코커서스 3개국 중에서 가장 경제가 어려운 나라입니다. 허지만 자존심만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아르메니아가 어떤 나라이고 그 민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나는대로 적어 봅니다.

오래된 교회와 수도원 같은 문화재가 망가지고 있어도 종교시설에 입장료를 받을 수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 들인 나라(로마제국의 313년보다 12년 빠른 301년)

역사가 유구한 나라-구약성경에도 수 차례나 아르메니아라는 나라이름이 나오는 나라

수도 예레반이 BC782년에 세워졌다고 유적의 명문에 나타난 오래된 도시

지금부터 1610년전인 405년에 고유문자를 창안한 나라(우리나라처럼 창안한 사람이 명백한 글자)

기원전부터 로마제국,페르시아,오스만 터키,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없어지는 비극을 겪었어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나라를 지켜 온 민족

먼 시기도 아닌 20세기에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같은 민족적 비극을 겪고 150만명의 동포를 잃은 민족

국내에 거주하는 인구보다도 해외교포의 숫자가 더 많은 민족(국내거주 인구 300만명,해외거주 800만명 추정)

러시아에 400만명의 아르메니아 인이 거주하고 있어 푸틴 대통령으로 하여금 "내가 실질적인 아르메니아 대통령"이라고 할 정도.

그래도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나라에서 독특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조국돕기를 끊이지 않는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