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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우리민족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태어난 곳 고리(Gori)

양선재 2014. 6. 25. 23:57

우리민족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태어난 곳 고리(Gori)

희망봉40 2014.06.25 07:00    http://blog.daum.net/snuljs/16501425 에서 복사한 글입니다.

러시아 군사도로와 아라그비 강가에 있는 아나누리 성채

 

카즈베키를 떠나 조지아의 서부지역으로 이동하던 중에 아라그비 강가의 작은 언덕에 있는 아나누리 성채를 만납니다.

얼마 전 조지아를 취재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던 국내의 한 방송국 PD가  찾아낸 포토 포인트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멀지 않은 다리 가까운 곳에서 찍는 것인데 과연 성채의 전체 모습이 균형있게 나타납니다.

 

 

아나누리 성채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는데 그 중 큰 성모성당의 내부 모습입니다.

 

11시 30분경에 고리시내에 들어섰습니다.

고리(Gori)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서쪽으로 76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5만명 정도의 도시입니다.

시다 카르틀리즈의 주도이지만 인구는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고리 시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고리에는 소련식의 크고 웅장한 건물들도 있지만 대부분 건물들은 낡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소련식의 웅장하지만 멋은 없는 건물도 보입니다. 시청같은 관청건물인 듯 싶습니다.

 

고리시는 2008년 러시아와 조지아가 전쟁을 할 때에 러시아 군에게 점령되었었던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리 도착시간은 점심시간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고리는 두 개의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민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모양입니다.

특히 송어가 많이 잡히는지 스탈린도 고리의 송어요리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점심메뉴에도 송어가 올라온답니다.

살아 있는 송어가 있는 연못 등 정원이 아름다운 레스토랑의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습니다.

스탈린도 좋아했던 송어요리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막상 나온 송어요리는 송어구이였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물고기를 조리해 먹는 방법은 너무 단조로운 것 같지요.

우리나라에서 송어는 회로 먹고 매운탕을 끓여 먹는데 송어구이라니요. 맛도 별로였습니다.

함께나온 피자-토핑없이 치즈로만 만든 피자인데 의외로 맛이 좋습니다.

고리에 온 기념으로 카즈베키란 상표의 맥주를 곁들입니다. 시원한 맥주가 좋아지는 날씨입니다.

 

점심먹고 고리시 근교에 있는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를 구경하러 갑니다.

가는 길에 이런 작은 주택들이 수백채 모여 있는 곳을 지납니다.

방 한 칸정도의 주택인데 집안에 화장실이 없어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이 주택들은

2008년 조지아와 러시아 전쟁으로 생긴 피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 진 것들이라고 합니다.

불과 5일간의 전쟁의 결과는 조지아의 참패로 끝이 났고 조지아는 영토의 상당부분을 러시아에 빼았겼습니다.

고리 시도 러시아군에 점령당하였지만 한 달 뒤에 러시아군이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그 과정에 많은 실향난민이 생겨났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 이런 집들인 것입니다.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 입구입니다.

이 동굴도시는 강가에 접해 있는데 이 경사진 동굴은 동굴도시와 강변을 연결하는 비밀통로로

동굴 도시에 물을 공급하고 위급시에는 피난통로로 이용되던 것이라고 합니다.지금은 관광객 통로로 이용되는 것이지요.

 

조지아의 볼거리는  기독교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이 동굴도시는 BC 4세기경부터 만들어진 것이라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는 번성했던 이 동굴도시가 쇠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동굴도시는 꾸준히 유지,번성하였으며 트빌리시가 이슬람에 의해 점령된 8~9세기에는 중요한 방어요새기능을 하였지요.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는 9~11세기에 전성기에 이르렀고 한 때 인구가 2만명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이 동굴도시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으며 1920년의 대지진으로 동굴중 취약한 부분들은 대부분 무너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재로 된 부분은 모두 멸실되었고 동굴들만 남았는데 동굴들중에는 이 사진에서 보듯이 목재로 인테리어를 한 듯

정교한 천정장식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 동굴은 지배자의 대관식을 거행하던 방이라고 합니다.

 

교수형을 집행하던 시설도 있는데 우리를 안내하던 박사장이 시연을 해보이고 있습니다.

과연 와인의 나라 조지아의 유적답게 이 동굴도시에조차  와인 저장시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약국시설이라고 합니다.

 

이 동굴도시를 발굴하면서 금 은 동으로 만든 장신구따위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트빌리시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저 언덕위에 보이는 것이 유일한 기독교 교회인데 이것은 한참 후대에 건축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를 관람하고 우리는 고리 시내에 있는 스탈린 박물관을 보러 갑니다.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김일성에게 탱크등의 첨단무기를 제공하여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야욕을 뒷받침함으로써

한반도에 참혹한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게 했던 사람이 바로 스탈린이었습니다.

그는 1878년에 고리시의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불가사의한 출세의 가도를 달렸고 비밀경찰을 통한 권모술수로 정적들을 제압한 뒤

소련의 최고권력자가 되어 1924년부터 그가 죽은 1953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을 지원하여 남북한 양쪽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2차대전 말기에는 만주와 연해주의 한국교포들이 일본군에 협력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을 중앙아시아로 대거 강제이주시키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동포들이 비참한 생활에 내몰리기도 하였습니다.

스탈린 박물관 전면의 회랑앞에서

박물관 앞 정원에 있는 스탈린의 조각상

스탈린 박물관 입구에 있는 스탈린의 조각상-많은 조각상과 그림에 스탈린은 왼손을 가리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젊은 시절에 사고로 팔을 다쳤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카펫에 그려진 스탈린의 초상화-그의 멋진 코밑 수염은 어렸을적에 앓은 천연두로 인한 곰보자국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탈린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놀란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가 한국동란을 전후해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북한에 관한 자료가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스딸린 저작집"이라는 책이 유일한 북한 자료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발간된 스탈린 저작집들중에 북한 책이 한 권 있을 뿐입니다.

박물관 2층의 전시실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연합국의 전략을 협의한 테헤란 에서의 3개국 정상회담에 참석중인 스탈린.

스탈린의 옆에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보입니다.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맞아 중공군에서 보낸 만수무강 기원 깃발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많은 70세생일 기념선물들입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만수무강하지 못하고 1957년3월 5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스탈린 박물관 옆에 스탈린 생가를 복원해 놓았는데 스탈린의 이 집의 방한칸에 세들어 살던 부모에게서 태어났지요.

이 출입문 안에 스탈린의 가족이 거처하던 단칸방이 있고 그 아래 지하방에서 스탈린의 아버지는 구두수선을 했다고 합니다.

박물관 옆에 스탈린이 즐겨타던 전용열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전용열차는 철갑으로 무장되어 무게가 무려43톤이나  된다는데 내부는 의외로 화려하지 않습니다.

한가지 특별한 점은 좁은 객차내에 여기저기 거울이 많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이 외모에 신경을 써서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스탈린의 자신이 암살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뒤에 있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게 하기위해서 그렇게 거울을 많이 걸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