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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타이베이여행기 - 4. 장개석과 송미령의 그림자

양선재 2014. 6. 2. 23:57
희망봉40 2010.11.13 07:00
http://blog.daum.net/snuljs/16500865  에서 복사한 글입니다.

 

                             대만의 현대사에서 장개석과 송미령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큽니다.

                             그런만큼 지금도 도처에서 그 두 사람의 그림자를 만나게 됩니다.

 

                             중국본토에서 중국공산당과의 전쟁에 패배한 장개석은 1949년에 200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대만으로 철수하여

                            그곳에서 본토수복의 대망을 품고 1975년 서거할 때까지 국력을 키우면서

                            타도 중국공산당과 본토수복의 염원을 키웠었습니다.

 

                           장개석총통 생애의 중요한 사진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중정기념당에서는

                           특히 장개석총통과 그의 부인인 송미령의 모습을 자주 대하게 됩니다.

 

                            <중정기념당 관람을 마치고>

                           <중정기념당앞에 있는 자유광장앞의 대만 학생들-높은 깃대위에 휘날리는 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기 인상적입니다.>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식 사진- 그들은 1927.12.1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들이 결혼하였을 때 장개석은 40세, 송미령은 30세였습니다.

                          장개석은 나이가 많았을 뿐아니라 이미 결혼하여 부인과 아들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송미령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으나 장개석은 아니었습니다.

 

                          송미령은 절강성의 대기업가인 송가수란 사람의 세 딸 중의 막내로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형부인 손문을 돕고 있었는데 손문의 집안을 드나들던 장개석이 그녀에게 반해서 청혼을 한 것이었죠.

 

                         송미령의 언니이며 손문의 부인이었던 송경령은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혼을 격렬히 반대하였습니다.

                         장개석의 나이나 종교적인 문제뿐만아니라 장개석이 중국의 국부인 손문의 후계자가 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미령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장개석과 기어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송미령이 장개석과 결혼을 하자

                        중국사람들은 송씨 가문의 세딸 중 첫째 송애령은 "재산을 사랑"하였고

                        둘째 송경령은 "중국을 사랑"하였으며 막내인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하였다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송애령은 북부지방의 대기업가인 공상희와 결혼하여 중국의 남북재벌세력의 연합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았고

                       둘째 송경령은 후일 중국의 국부로 추앙을 받은 손문과 결혼하였고

                       중국공산당이 중국본토를 지배하고 장개석이 대만으로 피신한 뒤에도

                       중국에 남아 말년에 중국공산당으로부터 국가부주석의 직위를 받기도 하였으니

                       중국을 사랑하였다는 말을 들을 만하였습니다.

 

                      막내 송미령이 군인인 장개석과 결혼한 것을 두고 장차 장개석이 군인으로써 대성하여

                      중국을 지배하는 지위에 오를 것을 내다 본 것이었기에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한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지요.

 

                      아무튼 대단한 세자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대단한 세자매의 이야기는 1997년에 “송가황조”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답니다.)

 

                     아무튼 장개석과 결혼한 송미령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며 쌓은 유창한 영어실력과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장개석의 대외 활동을 적극지원하게 됩니다.

 

                            <송미령의 장개석 지원은 위 사진에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3년의  카이로 연합국 수뇌회담에서 장개석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영국의 처칠수상과

                            만날 때 송미령이 배석하여 통역겸 조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이 때부터 송미령은

                            중국에서 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제일 유명한 중국여인이 되었습니다.>

 

          

           <1971년 중화민국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시의 장개석 총통부부-송미령이 사랑한 권력의 정점에 선 때일까요?>

 

           대만사람들 사이에는 아직도 "장개석은 과연 대만(중국이 아니고)의 영웅인가 죄인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합니다. 항일투쟁을 이끌었다는 등 장개석의 영웅적치적도 많이 있지만 그가 대만으로 피난을 왔기때문에 중국이

          분단국가가 되었고 대만으로 피난온 후에 몇십년동안  계엄령치하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등의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정기념관에서는 우리나라와 관련되는 사실들도 찾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1924년 중국의 육군사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 개교식에 참석한 장개석(가운데)- 앞줄 맨 왼쪽에

                             김구선생의 모습(안경쓴 사람)이 보입니다.>

 

                            <1966년 대만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장개석총통과 회담하고 있는 모습.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두 사람은 돈독한 우의를 지녔었지요.>

 

                            <중정기념당안에 있는 장개석총통의 동상-무게가 25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장개석 총통 동상앞에 서 있는 위병의 모습- 좌우에 한 사람씩 서 있는데 이들은 보초근무중에는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 일행중의 누군가가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산 사람을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권침해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장개석 총통은 1975년4월 5일에 89세의 나이로 서거하였으며 송미령 여사는 장총통 사후에 미국으로

                         가서 살다가 2003년에 106세의 나이에 생을 마쳤습니다. 그녀는 19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에

                         사망하였으니 3세기에 걸친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사림관저 외벽에 있는 사림관저 표지판-장개석총통과 송미령의 관사로 쓰던 곳입니다.>

                           중정기념관 관람을 마친 우리 일행은 사림관저(士林官邸)에서 다시 장개석 총통과 송미령의 흔적을

                           만나게 됩니다. 사림관저는 두 사람이 생전에 거주하던 관사였다고 합니다. 장개석 총통 서거이후

                           송미령 여사마저 대만을 떠나자 정부에서는 이곳을 그들이 생전에 가꾸던 그대로 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장개석총통은 사망할 때까지 본토수복의 꿈을 놓지 않았고 대만에서의 생활을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것으로 여겼기에 관사 같은 것에 돈을 쓰지 않고 검소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송미령 여사는 사는

                          집에는 돈을 들이지 않았지만 꽃을 좋아하였기에 정원 가꾸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 덕에 타이베이 시민들은 아주 아름다운 정원공원을 그들의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입구 건물에 장개석 총통과 송미령의 진품(珍品)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있습니다.>

 

                            <사림관저 정원내의 이정표>

 

 

                            <인위적인 느낌이 들도록 정원수를 가꾸어 놓았습니다.>

                            <아치를 이용한 정원가꾸기의 모습>

 

                            <장개석총통과 송미령의 관사로 쓰던 건물-철책으로 굳게 차단되어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식 정자도 있습니다.>

                             <정원수 사이에 설치미술도 장식되어 있습니다.>

                            <사림관저의 아름다운 공원을 관람하고 있는 우리 일행들입니다.>

                            <청바지와 바켓츠를 이용한 설치미술작품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