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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대만 선교 '결실과 과제'(하)사회환원 선교

양선재 2014. 7. 14. 11:33

출처 : 기독공보

대만 선교 '결실과 과제' (하)사회환원 선교
[2927호] 2014년 03월 06일 (목) 15:47:16 [조회수 : 471] 박만서 기자 mspark@pckworld.com
▲ 김달훈 목사의 대만선교 35주년을 맞아 교회와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다. 사진은 지난 2월 15일 열린 35주년 기념 만찬에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는 김달훈 목사.

선교로 국가 간 신뢰 높였다

교민사회 이끌며 민간협력 강화ㆍ수교단절 극복 노력

대북한국기독교회 원로 김달훈 목사가 일구어 놓은 대만 선교는 한인 교포들을 대상으로 한 디아스포라 선교와 이 디아스포라 선교의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진 '사회환원선교'를 꼽을 수 있다. 사회환원선교는 김 목사가 교회를 중심으로 교포들을 대상으로 이룩한 디아스포라 선교의 한 축을 두고 이루는 말이다. 이 사회환원선교는 교민 사회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확대된 선교로 김 목사만이 갖는 교민 사랑 방법이다.

2004년에 교회를 은퇴한 김 목사가 10년이 지난 현재까지 대만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대만 한인 교민 사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에 선교사로 대만에 첫 발을 내딛은 김달훈 목사가 유학생들에게 매주일 김치 깍두기 곰탕을 제공한 애찬선교가 사회환원선교의 시작이다. 이 애찬에 참여했던 유학생들이 귀국해서 각각의 분야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잡았다. 가장 어려운 유학생활 중에 김 목사 부부가 그들의 아버지요 어머니가 되었기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다.

김 목사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회환원선교는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서울올림픽을 해외에서 홍보하기 위해 조직된 재중한인88서울올림픽후원회 회장으로 활동한 경험이다. 대만에 거주하는 교민들이 경제적으로 열악하기 때문에 고민을 하던 중 김 목사의 생각은 서울올림픽 상징인 호돌이에 꽂혔다. 백두산 호랑이를 연상하면서 대만에 자생하는 홍회목을 어렵게 구입해 길이가 4m에 이르는 호랑이를 조각해 조직위원회에 기증을 했다. 이 호랑이 조각이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건물 현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작업을 진두지휘했던 김 목사는 "대만의 교민들이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도 정성을 모아 반만년 역사에 처음으로 열린 잔치에 동참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며, "이후에 미국 교민사회에서 이같은 소식을 듣고 찾아와 올림픽 홍보를 위해 똑같은 호랑이를 제작해 줄 것을 요청해와서 두번째 호랑이 조각을 제작해서 미국으로 보낸 일이 있다"고 밝혔다.

또한 대만에 거주하는 교민들의 자녀교육을 위해서도 김 목사의 역할은 컸다. 이미 대만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교민사회의 중심 인물로 자리잡은 김 목사는 대북한국학교의 교사가 낡고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을 지켜 볼 수만 없었다. 1992년 한국과 대만간에 수교가 단절되면서 대만내 한인들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만내 유일한 한국인 학교 대북한국학교도 학생수가 줄어드는 등 축소될 위기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 극복을 위해 1994년에 대북한국학교후원이사회가 출범을 하게 되었으며, 이사장은 당연히 김 목사의 몫이 됐다. 이 때부터 오늘까지 김 목사는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당시를 회상하는 김 목사는 "단교가 선언되면서 주재원들이 철수하는 등 교민수도 줄어들고 학생도 급격히 감소하면서 위기를 맞이한 학교를 살리기 위해 교민들이 마음을 모았다"면서 "당시 국내에서 국제화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일기 시작한 영어 교육 열풍에 힘입어 학교에 영어 원어민 강사를 초빙하는 등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힘써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교 교사가 오래돼 낡어 새로운 교사 건축문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그래서 2010년부터 국내 교육당국과 협의해 새로운 교사 건축을 추진했다. 정부의 지원과 함께 후원회 자체적으로 일정부분 건축비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건축위원장 자리 또한 김 목사의 몫으로 돌아왔다. 건축을 위해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주대북한국인대표부 정상기 대사와 함께 사방팔방 뛰어 다닌 결과 오는 6월에 대북한국학교 새교사 건축 첫 삽을 뜨게 됐다. 지난 2월 15일 열린 김달훈 목사 대만선교 35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김 목사 가족이 모아온 기금도 이날 학교 건축헌금으로 정상기 대사에게 전달됐다.

김 목사의 사회환원선교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특히 2004년 은퇴후에 김 목사의 눈은 대만내에 거주하는 한인 노인에게 쏠렸다. 그는 "국내에서는 노인복지 정책이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대만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여전히 어럽게 생활하고 있다"면서 "이들 중에는 일제당시 종군위안부로 끌려와 숨죽이고 살고 있는 노인도 포함되어 있고, 노인들 대부분 외식을 한번 하기도 힘든 생활고 속에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김 목사는 교회를 은퇴한 다음해인 2005년 1월에 처음으로 대만내에 경로대학을 개교했다. 한국내 교회 후원으로 경로대학을 시작했지만 현재는 후원이 끊어져 2, 3년전부터 김 목사가 자비량으로 운영하고 있다. 경로대학이 알려지면서 대사관이나 한인 식당 삼원가든에서 초청행사, 경로잔치 등을 매년 열고 있다. 특히 김 목사는 "경로대학이 알려지면서 대만 교민 사회에서 경로사상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밖에도 김 목사의 사회환원선교는 대만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 복구에 대북한국대표부와 함께 구호로도 이어졌다. 당시 대사로 이 일에 앞장섰던 윤해중 전대사는 "단교 상황에서 한국정부와 교회의 도움으로 구호 활동과 복구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와 대만의 국가간 신뢰가 회복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김달훈 목사의 선교는 교회를 중심으로 교민사회까지 돌보는 폭넓은 선교 사역이다. 이를 통해 한국과 대만의 국가간 외교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특별한 선교 모델을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원주민 사역의 중심 '하분교회'
'김달훈 선교사 원주민 선교 기념교회' 지정

▲ 하분교회 현판 앞에 선 김달훈 목사(좌)와 김순권 목사.

대만은 섬나라 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산이 많다. 또 이 산에는 대만의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원주민(산족)들이 각각의 부족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한 김달훈 목사의 선교활동은 특별하다.

김 목사는 "원주민은 말은 있으나 문자가 없으며, 그들만의 토속신앙이 있었다"고 선교 초기의 상황을 설명하며, "이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면서 많을 때는 16개처의 교회지도자들의 생활비를 지원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김 목사의 원주민 선교는 10년전 김 목사가 은퇴할 당시 건축된 하분(下盆)교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낡고 협소해서 더이상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 없는 하분교회를 김 목사는 한국과 미국 교회의 후원으로 55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예배당을 건축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서 교회 교인들이 새로 건축된 교회당을 '김달훈 선교사 대만원주민교회협력선교 25주년 기념교회'라고 지칭하고, 이 글을 현판에 새겨 교회 현관벽에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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