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교육/5. 재난·안전

[스크랩]도시와 공동체 사이에서 : 공동체 기반의 재난관리는 가능한가?

양선재 2020. 12. 5. 17:30

출처 : 연극in. 192호. 2020.12.3

도시와 공동체 사이에서 : 공동체 기반의 재난관리는 가능한가?

박은선_리슨투더시티 디렉터

‘리슨투더시티’에서는 2017년 포항 지진 이후로 한국과 일본에서 재난을 겪은 장애인과, 장애인권 단체 활동가, 재난전문가들을 인터뷰해왔고 장애유형별 재난 대비 워크숍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올해는 이 인터뷰들을 홈페이지에 수록하는 작업을 하고, 발달장애인용 코로나 대응 매뉴얼, 청각장애인용 재난 대비 워크숍 매뉴얼을 개발 중이다. 회복 도시 프로젝트를 통해 3년간 총 65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고 근거 이론(grounded theory)을 통해 인터뷰를 코딩했는데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결론 몇 가지를 요약하자면 첫째 이웃과 지역 공동체의 중요성, 둘째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 셋째 장애 비장애 통합교육의 중요성이다. 오늘 이 글에서는 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재난 관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워크숍 포스터 (출처: 리슨투터시티 홈페이지)

이웃과 함께 대비하는 재난 관리가 중요하다는 결론은 개인적으로 썩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통적 개념의 지역공동체는, 가부장제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젠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과연 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재난 관리를 할 수 있을까?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여성으로서, 또한 아이리스 영이 지적하듯 사회주의 정치철학이 지나치게 공동체주의를 낭만화하는 것(Young, 2011, 1988)에 반감이 있었기 때문에,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재난관리 방법(Community Based Disaster Management)은 실효성 없는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터뷰이들의 경험에 의하면 재난이 발생했을 때 이웃, 그리고 사회적 자본은 재난에 대응하고 회복하는 데 있어 결정적 요소였다.

특히 재난 취약계층에게는 지역 이웃과의 연결고리가 중요한 요소다. 장애인의 경우 보통 비장애인에 비해 직업을 가진 비율이 낮고 사회적인 관계망이 작다. 그 때문에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가까이 사는 사람이 그 장애인의 존재를 알아야만 도울 수 있다. 대형 재난이 일어나면 전문적으로 훈련된 구조원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대형 재난일수록 공공서비스는 마비되기 때문이다. 실제 1995년 일본 한신 아와지 대지진 때도 65%의 사람들은 이웃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러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평소 이웃과 관계가 전혀 없었던 한 장애인의 경우 생사여부 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한신 대지진 때 모두가 느낀 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이웃 중에 지역주민과 얼마큼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에요. 한신 대지진이 났을 때 바로 갔어요. 다들 굉장히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해줬는데, 역시 이웃과의 관계성이 있던 사람은 도움을 받고 있었지요. 몸의 반이 마비인 사람이 지진 때 집에 매몰됐는데, 이웃과 인사하며 살았으니까, 이웃이 구조된 사람 중에 그가 없다는 걸 알고 그래서 바로 부르러 왔대요. 집 잔해 안에서 소리 내서 ‘여기 있어, 살려줘’ 하고 몇 번 말했더니 ‘여기서 소리 난다’ 하면서 다 같이 파내 줬대요. 그와 반대되는 건 아니지만, 요전번 후쿠시마 이와키에서 숨진 사람은 중증 선천성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주변 이웃과 연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현재 생사 여부도 알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장애해방 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 아사카 유호 (Park, 2019)).”

2019년 고성 산불 때도 대부분 취약계층은 소방관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렇듯 이웃이 서로 도와 재난에 대응하는 체계를 ‘공동체 기반 재난 관리’(Community Based Risk Management)라고 한다(Acosta and Chandra, 2013; Allen, 2006; Shaw et al., 2011). 그런데 공동체 개념이 사라진 서울 같은 도시에서 이런 이상적인 재난대비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 공동체 기반의 시스템을 만들자고 말하는 것은 왜 어려운가? 공동체 기반 재난 관리 시스템을 만들기 전에 왜 전통적 방식의 공동체가 사라졌는지를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작년에 있었던 재난도시 인터뷰집 발간회 포스터 (출처: 리슨투터시티 홈페이지)

왜 현대사회는 전통적 방식의 공동체를 버리고 최소한의 접촉만을 허용하는 대도시의 익명성을 선택했을까? 그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젠더다. 남성 중심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있어 보이지 않는 노동은 대개 여성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밥을 하고, 설거지하고, 아이를 기르는 일은 하찮은 일로 여겨졌으나 사실 그러한 사소한 노동이 없다면 공동체는 지탱될 수 없다. 문제는 그 사소한 노동을 여성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전통적 형태의 공동체는 여성의 가능성을 착취하는 형태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익명성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도시를 "이방인들이 서로 마주칠 만한 장소"라고 정의했다(Sennett, 2017). 작은 지역 공동체는 익명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시 한 복판을 걷다 보면 새로운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며, 현대 사람들은 그 연속되는 낯섦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현대인들이 사생활과 개인적 삶이라는 가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언택트 시대에 타인과 접촉은 공포이지만 역설적으로 누군가 마스크를 만들지 않았다면, 누군가 내가 먹을 쌀을 기르지 않았다면, 누군가 그 쌀을 배달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렇듯 인간 사회의 공동체라는 것은 양가적 성격을 갖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2019년 대형 산불 발생 시 결국 마을이 사람들을 구했다. 그러나 대도시에는 우리를 구해줄 이웃도 마을도 없다. 우리는 가부장적인 전통적 공동체의 관계성과 도시의 익명성 사이에서 억압적이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태를 찾기 위해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선행 조건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너무나 먼 이야기 같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어질 때 비로소 도시 공동체에서 노동의 분할과 역할 그리고 공동체성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체주의 운동이나 마을 운동을 해온 집단들 대부분이 성차별을 가볍게 보거나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문제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그 마을들의 공동체 실험은 사라지고 말았다. 젠더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대안적 형태의 도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없다. 결국 공동체 기반 재난 관리 방법은 젠더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지출처 : http://www.listentothecity.org/filter/project]

[참고문헌]
Acosta, J., Chandra, A., 2013. Harnessing a community for sustainable disaster response and recovery: An operational model for integrating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Disaster medicine and public health preparedness 7, 361–368.
Allen, K.M., 2006. Community‐based disaster preparedness and climate adaptation: local capacity‐building in the Philippines. Disasters 30, 81–101.
Park, E., 2019. 재난도시-장애인 비 장애인 포괄 재난 대비 인터뷰집. Listen to the City.
Sennett, R., 2017. The open city, in: In The Post-Urban World. Routledge, pp. 97–106.
Shaw, R., Ishiwatari, M., Arnold, M., 2011. Community-based disaster risk management.
Young, I.M., 2011. 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Young, I.M., 1988. Five faces of oppression. Geographic thought: A praxis perspective 55–71.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디렉터

리슨투더시티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미술과 도시공학을 전공하고 현재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 환경공간정보 및 재난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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