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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엘리시움과 피티케의 정치경제학 - 소득 분배-

양선재 2014. 7. 23. 09:00

   386호 2014. 7. 15
‘성숙의 불씨’는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에서
주 1회(화)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엘리시움’과 피티케의 정치경제학

 

 


 

  세계를 둘로 나누는 기준은 역사에 따라 변한다. 과거에는 신분으로, 현대에는 소득과 부로 나누어진다. ‘하나의 인류’, ‘두 개의 세계’는 항상 불안정하고 긴장이 존재한다. 과학기술의 경이로움에 감탄하였던 계몽주의 시대의 근대인들은 과학기술이 모든 사람에게 기회와 풍요, 행복을 보장하는 과학기술의 유토피아 ‘아틀란티스’를 꿈꾸었다. 그들이 생각한 과학기술의 세계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든 사람이 함께 잘사는 하나의 세상, 하나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개의 세상이 선행이나 믿음이 아니라 부나 소득으로 나누어져 대립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닐 블롬캠프 감독이 만든 SF 영화 <엘리시움, Elysium>은 부로 갈라진 두 개의 세계를 극적으로 그려냈다. 원래 엘리시움은 이상향으로, 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나 영웅들이 죽은 뒤에 가는 곳이다. 나아가 선택된 자들, 바르게 산 자들, 영웅적인 삶을 산 자들도 엘리시움에서 축복되고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나 영화 <엘리시움>에서는 부자들만이 그곳에 산다.

 

  21세기 말 지구는 병들고 오염되고 인구는 폭증하였으며, 서기 2154년 지구는 둘로 갈라졌다. 부자들은 지옥 같은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초호화 우주 도시 엘리시움을 건설하였다. 푸른 녹지로 가득찬 엘리시움의 주민들은 하루 종일 로봇들의 시중을 받고 아프지도 늙지도 않는다. 무슨 병이 걸리든 엘리시움에서는 치료 부스에 들어가기만 하면 병이 완치된다.

 

  엘리시움을 유지하는 것은 지구 도시에 사는 로스엔젤레스인의 노동이다. 지구는 일종의 엘리시움의 식민지다. 엘리시움에서는 첨단 과학 기술과 로봇을 이용하여 지구를 통제하고 감시한다. 엘리시움에서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기 위해 지구인을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하면서 위험한 일을 강제한다. 열악한 지구에서 병든 사람들은 엘리시움으로 가기 위해 셔틀을 타고 위험한 모험을 하지만 이 셔틀을 발견한 엘리시움의 국방장관은 가차없이 그 셔틀을 격추시킨다.

 

  영화 <엘리시움>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한 두 세계, 두 계급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화 이후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와 불평등의 문제를 부각시킨 것이다.

영화 <엘리시움>은 빈부격차로 인한 부자의 나라 엘리시움과 가난한 자들의 나라 황폐한 지구 사이의 갈등을 동시대 다른 공간의 문제로 대비시켰지만, 이것이 동일 시간 동일 공간 안에서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엘리시움’의 문제를 불평등의 문제로 정형화하여 정치경제학적으로 접근한다.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된 <21세기 자본>을 통해 피케티는 지난 300년 동안 여러 나라에서 불평등이 얼마나 심화되었는가를 실증적 자료를 통해 입증하였다.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불평등은 앞으로도 심화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은 사회정의라는 민주주의의 기초를 붕괴시킴으로써 ‘상속 자본주의’ 사회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불평등의 원인은 소득과 부의 차이인데, 자본에 의해 부가 축적되기 때문에 부를 상속받는 부자는 영원히 부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등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라 사회 질서에서 정치경제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여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피케티는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길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상속 자본주의’를 바로잡기 위해 진보적인 재산세와 소득세, 상속세를 제안한다.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는 자본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면, 자본은 국경을 넘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글로벌 세금’이 필요하다. 세금을 국가 차원이 아니라 전지구적 차원에서 부과하자는 것이다. 피케티는 당장 이러한 세금의 실현가능성은 낮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르크스와 달리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파괴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통해 자본주의를 보존하려고 한 점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사회 혁명가들과는 구분된다. 피케티가 좌와 우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으면서, 폴 크루그먼과 같은 경제학자의 지지를 받는 것도 그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때문이다. <21세기의 자본>에는 여러 경제학적 통계와 분석이 나오지만 결국 롤즈와 같이 조세를 통한 재분배가 불평등 해소책으로 제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케티의 불평등 이론과 해결책이 우리 사회에도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고, 9월 경에는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회정의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감성적 공감대가 높은 우리 사회에 피케티의 정치경제학은 경제 민주화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성장보다 재분배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많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경제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에 대한 학문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쓴이 :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 글 내용은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