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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발견이의 도보여행] 서울 한양도성 걷기 ④... 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 (월간산 2012년 7월호)

양선재 2014. 7. 2. 19:00

[발견이의 도보여행] 서울 한양도성 걷기 ④... 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 (월간산 2012년 7월호)| 여 행 정 보
발견이(윤문기) | 조회 271 |추천 0 | 2012.07.20. 17:31 에서 복사한 글입니다.

[발견이의 도보여행] 서울 한양도성 걷기 ④

어둠에 빛나는 성곽이 예 있으니…

[출처] 월간산 513호 2012. 7월호

[글] 윤문기 (사)한국의 길과 문화 사무처장ㆍ발견이의 도보여행 운영자


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 3.2㎞

1. 순성놀이의 즐거움

2. 1구간(숭례문~정동거리~인왕산~창의문)

3. 2구간(창의문~북악산~숙정문~혜화문)

4. 3구간(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

5. 4구간(광희문~남산~숭례문)

6. 서울성곽 주변의 걷기명소들(부암동과 성북동)


혜화문... 숙정문 대신 북쪽의 큰 통로가 되다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로 북동쪽에 지어진 혜화문(惠化門)은 실질적인 큰 문으로 기능했다. 본래 북대문으로 만들어진 숙정문이 북악산 깊은 산중에 위치한 탓에 실질적인 통로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혜화문이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경원가도 상에 있었던 것도 대문의 역할을 하는 큰 이유가 되었다. 애초에 지어진 혜화문은 구한말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지금의 창경궁로 언덕 위를 지켰으나 일제강점기 때 전차로를 낸다는 명목으로 완전히 헐리고 말았다. 지금의 혜화문은 1992년에 새로 복원한 것으로 원래 자리는 차량 소통이 많아 북쪽으로 20m 정도 옮겨져서 세워졌다.


▲ 낙산 야경의 제1경으로 꼽는 흥인지문 방향 앵글.


혜화문과 낙산은 창경궁로 너머로 지맥이 이어지지만 찻길을 건너는 횡단보도가 없어서 200m 정도 떨어진 한성대입구역을 통과해서 돌아가야 한다. 갈 곳을 코앞에 두고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서울시에서 혜화문과 낙산을 잇는 구름다리를 계획하고 있어 몇 년 후에는 원래의 성곽을 이어 걸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지금은 한성대입구역 5번 출입구로 들어가서 4번 출입구로 나와야 혜화문에서 낙산성곽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복잡한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가야 오를 수 있었던 낙산을 2010년 전체적으로 정비해 창경궁로에서 곧장 낙산성곽을 따라 오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 낙산성곽은 밤마다 화려한 빛의 드레스를 입으며 놀라운 변신을 한다.


낙산성곽... 조선왕조의 장자계승이 어려웠던 이유

낙산은 쉬엄쉬엄 걸어도 20분이면 정상에 닿을 수 있을 만큼 짧고도 유순한 길을 내어놓는다. 내사산 중에 가장 낮다는 것보다는 작은 언덕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이겠다. 본래 낙산이 자리한 한양도성의 좌청룡 자리는 남자와 장자(長子)를 관장하는 곳인데, 낙산이 인왕이나 북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가 낮고 허하다 보니 조선왕조 내내 장자보다는 지손들이 잘 되었고, 여인들과 외척의 기세가 등등했다고 보는 풍수적인 시각이 오래전부터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또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것도 풍수가들은 이 낙산의 지세에서 이유를 찾곤 한다.


이런 이유로 한양도성의 건축을 구상할 당시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북악산 주산론과 인왕산 주산론을 놓고 의견이 대립했다고 한다. 인왕산 주산론을 편 무학대사는 지금처럼 도성이 남향으로 서면 낙산인 좌청룡이 허약해져서 장자계승에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고 보고 동향을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유학자인 정도전의 ‘군자는 남쪽을 향해 정치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지금처럼 종묘와 사직단, 궁궐이 남쪽을 향해 들어섰고, 각 방위에 맞춰 사대문과 사소문이 건축되었다.


▲ 서울성곽길 3구간 개념도

[일러스트 제공 및 저작권자] (사)한국의 길과 문화 www.tnc.or.kr (사)한국의 길과 문화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서울 한양도성 걷기’ 소책자 PDF를 국ㆍ영ㆍ일문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왕조는 27대를 이어오는 동안 장자계승을 단 일곱 차례밖에 하지 못했다. 그마저도 대부분 단명하거나 단종처럼 왕위를 찬탈당하고, 연산군처럼 불행하게 일생을 마감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자로서 보위를 물려받아 제대로 치적을 이뤄낸 왕은 숙종 한 명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낙산이 조선왕조의 장자계승을 막고 환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과 달리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낙산은 봉긋 솟은 봉우리가 낙타와 닮았다고 하여 낙타산이라고도 불렸고 지금도 낙타 낙(駱)자를 이름으로 쓴다. 그 밖의 이름으로는 우유를 생산하는 목장이 있었다고 하여 우유의 한자표기인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낙산은 예로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계곡의 암석이 수려하기로 유명했다. 덕분에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며 조선시대 문인들과 세도가들의 별장과 정자가 여러 곳 들어서 있던 별천지이기도 했다.


▲ 원래 자리에서 20m 정도 북쪽으로 옮겨져서 복원된 혜화문.

새에 의한 피해가 많아 홍예에 봉황을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근대 들어 낙산은 성곽 가까이 아파트 건축과 같은 개발에 밀려 성곽이 훼손되는 등 부침이 있었으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아파트가 철거되고 근린공원으로 지정됨은 물론 성곽까지 완벽하게 복원되어 수많은 시민들이 찾는 쉼터가 되었다. 특히 밤에 바라보이는 야경은 북쪽 자락과 남쪽 자락 모두 훌륭하다. 성곽에 비춘 야간조명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600년 역사의 산물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신기루 같은 풍광을 그려낸다.


최근 들어 서울성곽과 관련된 대규모 조성공사가 벌어진 곳도 바로 낙산의 남쪽 자락이다. 흥인지문과 연결되는 낙산 남쪽에 있던 병원 건물을 철거하고 그곳에 성곽 복원과 더불어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덕분에 흥인지문과 낙산이 연결되는 통로가 한층 시원하고 간결해졌다.


▲ 1 광희문(光熙門)은 빛나는 이름과 달리 시신이 나가는 곳이라고 하여 시구문이라고 많이 불렸다.

2 낙산은 공원녹지확충 계획에 따라 순차적으로 조성을 마쳐 누구라도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로 탈바꿈했다.


흥인지문~청계천~광희문... 유일하게 옹성 방어장치를 한 한양의 성문

동쪽에 있어 동대문이라는 별칭으로도 많이 불렸던 흥인지문(興仁之門)은 2008년 숭례문 화재로 인해 한양도성에서 유일하게 원본으로 남은 대문이 되었다. 또 도성의 여덟 문 중에 유일하게 옹성(문 밖으로 반원형으로 빙 둘러친 방벽)이 축조된 문이기도 하다. 이곳의 방비를 다른 곳보다 특별히 튼튼하게 한 것은 동쪽의 지세가 무르고 낮기 때문이다.


즉, 흥인지문이 있는 곳은 청계천의 하류로 배후습지 지역이기에 땅이 다른 곳보다 무른 편이다. 그런 탓에 기초 공사 때부터 지반을 단단하게 다지는 사전작업이 필요했다. 다른 곳보다 서너 배 더 공이 들어가다 보니 공사기간도 길었다. 실록에 따르면 농번기 때 다른 곳의 인부들은 모두 공사를 마치고 귀향했으나 유독 흥인지문 일대만 공사가 늦어져서 인부들의 원성이 많았다고 했을 정도다.


▲ 1 낙산은 지세가 낮아 조선왕조의 장자계승이 어려웠다는 등의 여러 가지 풍수에 따른 구설에 휘말렸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언덕에 불과한 높이로 인해 서울성곽탐방로 중에 가장 편안한 탐방로로 자리매김했다.

2 비비추가 반기는 낙산성곽의 7월.


결과적으로 취약한 지형은 다른 곳보다 서너 배 더 공을 들여가며 갖가지 방어기제를 갖추게 된다. 이런 현상은 흥인지문에서 청계천을 거쳐 광희문에 이르는 구간에서도 발견된다. 동대문운동장 철거를 하면서 그 밑에 숨어있던 성곽의 방어장치인 치성이 드러났다. 치성은 성곽에서 툭 튀어나와 성곽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조물이다. 그만큼 한양도성은 지형적으로 취약한 동쪽 방어에 크게 신경을 써서 건축했다.


물론 아쉽게도 이런 훌륭한 방어장치는 정작 전란이 일어났을 때는 한 번도 제대로 써먹질 못했다. 전쟁이 나서 외적이 도성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임금이 재빨리 몽진을 한 탓이다. 그 바람에 도성에 남아 있던 양민들만 크게 희생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태조 5년에 건립된 흥인지문은 단종 1년인 1453년에 고쳐지었고, 고종 6년인 1869년에 대대적인 개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이 이른다. 이런 이유로 흥인지문의 문루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목조건축물로 대접받는다.


흥인지문을 지나 성곽의 흔적을 따라가면 청계천을 건넌다. 예전에는 다섯 개의 문이 물길을 막는 청계천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으나 지금은 청계천변으로 그 축소 모형만 남아 옛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오간수문의 모습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발굴 터가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나왔다. 거의 온전한 모습 그대로 문이 두 개인 이간수문(二間水門)이 발굴된 것이다. 두 개의 수문이 남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을 통과하던 곳에 있었던 것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조성된 여러 조형물들을 보며 계속해서 성곽의 흔적을 따르면 이번 구간의 종점인 광희문(光熙門)을 만난다. 서울성곽 마지막 네 번째 순성구간인 남산이 바로 이 광희문에서 시작된다.


▲ 한양도성 여덟 개 문 중에 유일하게 옹성으로 방어에 만전을 기했던 흥인지문.

사대문 중에 유일하게 원본이 남아 있는 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