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섬기는교회]/사회[시민]

[스크랩]남겨두기-성숙의 불씨

양선재 2018. 9. 18. 22:12



남겨두기

 


  무대 위 피아노와 대면한 연주자는 손수건을 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땀을 닦아낸다. 두 손을 무릎에 모았다가 건반 위에 올리고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그동안 수없이 외우고 반복했던 악보를 떠올리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큰 울림과 함께 손이 건반 위를 날아간다. 피아노 소리는 연주장을 가득 채우며 묵직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청중의 가슴을 파고든다. 시간이 갈수록 연주는 더욱 안정감을 찾는다. 연주를 마친 후 박수와 더불어 이어지는 앙코르곡에서는 일을 마친 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며칠 전 다녀온 피아노 독주회의 모습이다. 많은 청중 앞에서 홀로 무대에 앉아 피아노만을 대면하고 있는 연주자의 모습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야 할 일을 마주하고 있는 리더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연주자는 한 시간 남짓 주어진 시간에 하고 싶은 모든 곡을 연주할 수는 없다. 선별하여 자신 있게 준비한 곡을 무아의 경지와 손끝의 감각으로 연주해 주어진 시공간을 채우고 다른 곡들은 다음을 기약한다. 준비와 연주가 훌륭했다면 박수와 앙코르가 이어질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스스로의 만족에 그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살아있는 전설로 일컬어지는 오명 전 부총리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41세에 체신부 차관을 시작으로 네 분의 대통령을 모시고 장관과 부총리를 지내며 우리나라를 IT강국으로 이끈 분이다.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아 어떻게 일을 만들어 갈 수 있었는지 여쭸다. 이에 "우선 그전에는 장차관이 바뀌면 방의 가구부터 모든 것을 바꾸었는데 아무것도 바꾸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모두 모여 다가올 정보화 사회의 미래에 대해 공부했다. 공부를 통해 공무원들의 생각이 바뀌고 비전이 생겼다. 그리고 국가의 발전에 꼭 필요한 것은 몇 가지를 정하고 힘을 모아 그것을 실현시켰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 사회는 현재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사법개혁, 부동산투기, 재벌의 세습과 갑질, 종교계의 세습과 비리, 경제성장 방법론, 북핵문제, 통상문제, 교육문제 등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 정권의 임기 내에 모든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연주자가 하고 싶은 많은 곡을 남겨두고 무대 위에서는 선별되고 연습된 곡을 완성하듯이, 정치 지도자도 많은 문제를 남겨두더라도 정말 중요한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 시간적 제약 하에서의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연주자가 악보를 외우듯이 지도자의 머릿속에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지금 꼭 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이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하고, 그 몇 가지 일을 임기 내에 완성한다면 사람들의 박수와 앙코르가 이어질 것이다.

 

글쓴이 : 권병규

· 법무법인 청현 외국변호사

  (미국 뉴욕주)

· 전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 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