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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창의적 영감을 주는 공간, 시애틀 공공도서관/글 조윤경

양선재 2015. 12. 2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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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크레존 담당자
  • 등록일2015.12.03
  • 조회수190

시애틀 취재기

 

1.창의적 영감을 주는 공간, 시애틀 공공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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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애틀 공공도서관

 

현재 시각 오전 7시. 나는 지금 시애틀 5번가에 있는 <특별함의 Specialty’s>라는 카페에 앉아 있다. 벽난로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땔감으로 쓰일만한 나무장작들이 곳곳에 쌓여있기도 하고 얼기설기 벽에 붙어있기도 하다. 산장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인가 싶은데 배기통이 그대로 드러난 천정과 시멘트만 쓱 바른 것 같은 기둥이 공장을 환기시킨다. 이런 복합적인 인테리어가 묘하게 익숙하다 싶더니 우리나라 대학가에 있는 카페들과 닮아 있다. 그건 그렇고 이곳의 커피는 정말 맛있다. 스타벅스를 탄생시킨 고장답게 시애틀의 어느 카페를 들어가도 커피가 훌륭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이 온 몸을 기분 좋게 타고 내린다.

 

추수감사절 휴일 기간을 이용해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시애틀의 도서관이랑 박물관을 취재하기로 했다. 천천히 보고 싶어서 일정도 4박 5일로 잡았다. 어제 새벽 6시 비행기를 타고 오전 8시 30분에 시애틀에 도착했다. 들은 바대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정신 번쩍 나게 추웠다. 한낮에는 햇살이 환하게 퍼지면서 28도까지도 올라가는 산타바바라의 기준에서 말이다. 경전철을 타고 다운타운으로 향하면서 유리창으로 보이는 노란 단풍에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 산타바바라의 나무들은 여전히 초록색인데 말이다.

 

4번가, 5번가, 파이크 거리를 걸어서 구경할 수 있고, 버스, 전차, 모노레일 등 대중교통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어서 오랜만에 참 살 것 같았다. 산타바바라에서는 슈퍼를 가더라도 차로 운전해서 가야되는데 말이다. 스타벅스는 우리나라 편의점만큼이나 많고(정말 몇 걸음만 걸으면 또 다른 스타벅스가 나온다), 온 천지에 먹을 곳이 널려 있다. 산타바바라에서 본의 아닌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던 나는 여느 여행객처럼 자연스럽게 살던 곳과 새로운 곳을 비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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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내부와 벽에 걸린 사진

 

카페의 벽에 걸린 여러 흑백사진들 중에 비행사가 우편물자루들 앞에 서 있는 사진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이번 여행에 가지고 온 책이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이었기 때문이리라.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다시 읽고 싶어진 책이었다. 야간비행에 나섰다가 폭풍우에 갇힌 조종사 파비앙에게 가장 절실했던 건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집이 아니었다. 자신을 인도해 줄 지상의 흔들리는 불빛 하나와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는 누군가 자기에게 아무 방향이든 지시를 내려준다면 그대로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암흑 속에 갇혀 있는 순간, 인간은 누구나 혼자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과 판단으로 어둠을 뚫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미국 서부에 살면서 ‘용기를 내어 행동하기’에 대해 자주 생각해보게 된다. 서부개척시대의 정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인지 내가 만난 이곳 사람들은 다들 거침이 없고 용감해 보인다. 야외 캠핑이나 야외 스포츠를 즐기고, 무엇인가를 고치고 만드는 일에서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손에 맡기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마음가짐이 있다. 수영장에서 보면 겨우 두세살 정도로 보이는 아기를 물에 거꾸로 던지고, 놀이터에서는 마치 암벽등반하는 대원을 격려하듯 그물 꼭대기까지 아이가 올라갈 수 있도록 온갖 코치와 응원을 하며 강하게 키우는 미국의 부모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어떤 면으로는 단순하기도 하지만 원칙에 충실하고 두려움 없이 행동하는 것이 미국을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정신이 아닌가 싶다.

 

내리는 비와 커피 덕분인지, 추억과 생각을 많이 불러일으키는 도시 시애틀에서 나는 무엇보다 회춘한 기분이 들었다. 낮인데도 어둑어둑하고,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사람들이 우산도 없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광경이 이맘때의 파리풍경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유학생 시절의 나로 돌아가 빠른 걸음으로(파리지엔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빠르다. 걷기 선수들이라 거의 날라 다닌다. 세계 시민 경보대회가 있으면 단연 1등을 할 거라 예상한다)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녔다. 본격적인 취재에 앞서 첫 날은 도시의 분위기를 한껏 만끽하기로 했기에 더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명성 높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생선 던지기 퍼포먼스도 구경했다.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중대 발표를 할 때처럼 구경꾼들이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 순간을 찍으려 운집해 있었지만, 그냥 몇 번 큰 생선을 던지고 받는 것이 끝이었다.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싱거운 건 미국에서 계속 경험하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시애틀 공공도서관’은 명성 그 이상으로 대단했다.

 

 

‘이런 곳에서 글을 쓰면 베스트셀러가 열 권 쯤 나오겠네.’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책읽기 싫어하는 아이도 여기 오면 신나게 책을 읽을 것만 같고, 수험생은 공부가 저절로 되며, 학자들은 훌륭한 논문과 위대한 저작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도서관이었다.

 

우선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의 건물부터가 흥미로웠다. 다면체 도형들을 여기저기 쌓아올린 것 같은 형태의 철골유리 건물이었다.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서 5번가로 난 문으로 들어가면 3층이 되고, 바다로 이어지는 거리의 문으로 들어가면 1층이 되었다(이 세계적인 건축가가 이화여대 학관 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닐까?).

 

도서관 층별로 핸드폰 아이콘이 있는 곳에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면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10층에서부터 내려오면서 내 눈 가는대로 구경하기로 했다. 가장 전망 좋고 속세로부터 먼 조용한 곳은 독서룸으로 할애되어 있었다. 아, 한 달만이라도 매일 이곳에 와서 공부를 한다면 한 소식 얻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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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층 독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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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형의 서고 바닥

 

9층부터 6층까지는 나선형의 구조로 자연스럽게 돌아서 내려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듀이십진분류법에 따라 900번 대의 역사, 지리책은 9층에, 800번 대의 문학책은 8층에, 700번 대의 예술책은 7층에 놓여 있어서 더욱 직관적으로 책을 찾기 쉽게 되어 있었다. 도서관의 다른 기능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6층 이하는 그렇게 기계적으로 매칭시켜 배치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6층은 잡지와 뉴스에 할애된 층이었다). 헤매지 않도록 바닥에 진하게 분류코드숫자를 적어 놓은 디자인도 친근했고, 책이나 도서자료뿐 아니라 관련된 특별한 방을 마련해둔 것도 신선했다. 900번 대의 서고 옆에는 넓은 책상에서 지도를 볼 수 있는 방이 있고, 700번 대의 서고 옆에는 음악 연습실이 있는 식이었다. 이런 뜻밖의 재미있는 공간을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공공도서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는 이 도서관 측의 섬세함과 배려가 느껴져서 감동스러웠다.

 

5층은 ‘혼합실 (mixing chamber)’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진, 정보검색 및 컴퓨터 작업에 할애된 층이었다. 여기에서 또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사서 데스크 뒤에 있는 여섯 개의 대형 LCD 화면에 주식시세표시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남자 사서 분에게 물었다.

 

“뒤에 있는 화면이 흥미롭네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했더니

“미안합니다. 국가 기밀이기 때문에 설명해드릴 수 없어요”라는 대답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정말요?”라고 했더니 “농담입니다”하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게 아닌가.

아, 미국에는 참 싱거운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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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주 르그레디 교수의 전자설치 작품

 

그가 말한 국가 기밀이란 건 UCSB 대학 인터렉티브 미디어과에 있는 조르주 르그레디(George Legrady) 교수의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기”라는 전자 설치작품이었다.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대출해 간 책, DVD 등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시각화하여 궁극적으로 시애틀의 커뮤니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5분 정도마다 화면이 바뀌는데, 현재 사람들이 대출한 총 권수가 범주 별로 수치화하여 보여지기도 하고, 대출한 책 제목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면서 흘러가기도 했다.

 

책 제목은 빨강색, DVD 제목은 초록색 등으로 차별화한 것도 재미있었다. 듀이코드 000부터 999까지 분류된 책의 제목들이 비처럼 흘러내리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쳐다보다가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빌려간 책이 뭐고, 몇 시에 빌려갔으며, 몇 명이나 오늘 이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갔는가를 우리가 이토록 세세히 데이터화, 시각화해서 알 필요가 있을까? 르그레디의 매혹적인 작품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도서관은 대중들이 검색하고 빌려간 책을 분석하고, 통계내고, 그 결과를 시각화해서 대중들에게 공유시킴으로써, 대중들 자신과 이웃이 어떤 관심이나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도서관은 정보를 저장하고 물리적, 디지털적인 자료들을 검색하거나 빌려주는 곳이라는 전통적인 역할을 넘어 커뮤니티의 소통과 창의적인 문화 형성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곳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시애틀 공공도서관 취재기는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조윤경 (이화여대 교수, UCSB 교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