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열매 맺기로 분주한 나무들과 눈 맞추기
형광톤의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좀작살나무의 열매 ⓒ 고규홍
바람이 쌀쌀합니다. 찬바람 맞으며 이 땅의 식물들은 겨울 채비에 더 바삐 나서겠지요. 무엇보다 봄부터 여름까지 내내 수고로이 준비했던 열매를 맺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즈음, 식물을 온전히 만나려면 열매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사진은 좀작살나무(Callicarpa dichotoma)의 열매입니다. 좀작살나무는 꽃 떨어지자 마자부터 열매를 맺었습니다. 작은 꽃이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났던 것처럼 열매도 올망졸망 모여 돋아나는 게 참 귀여운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바람이 차가워지면 점점 더 예뻐집니다.
날씨가 차가워지면서부터 좀작살나무의 열매에는 짙은 보랏빛이 돌기 시작합니다. 볕이 잘 드는 쪽부터 서서히 열매가 익어갑니다. 익어가면서 보랏빛이 선명해집니다. 사진에서처럼 위에서부터 천천히 보랏빛을 띠면서 익어가는 거지요. 아직 아래쪽의 열매들은 연둣빛이지만, 좀 지나면 나머지 열매들도 모두 보랏빛으로 변할 겁니다.
크기가 작으니 열매 안의 과육도 적어 새들의 먹이로서는 인기가 적은 듯합니다. 이 열매는 다른 나무의 열매에 비해 늦은 겨울까지 남아있는 편입니다. 한겨울에도 이 보랏빛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의 좀작살나무는 큰 연못 동쪽 가장자리에 소나무들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데, 이 좁다란 길을 지나게 되면 언제라도 눈길을 사로잡는 예쁜 열매입니다.

여름에 피어난 하얀 꽃이 지고 나서 맺어가는 노각나무 열매 ⓒ 고규홍
위 사진의 열매는 노각나무(Stewartia pseudocamellia)의 열매입니다. 개화기가 짧아 여름 개화기에 하얗게 피어나는 노각나무의 화려한 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나무 과에 속하는 노각나무의 꽃은 차나무 꽃 혹은 흰동백 꽃과 비슷하지요. 또 꽃도 좋지만 꽃 없을 때에도 줄기 표면의 얼룩이 예뻐서 좋은 나무이기도 합니다.
노각나무의 열매는 좀작살나무의 열매와 달리 큼지막하게 맺힙니다. 듬성듬성 꽃 피었던 자리에 그대로 맺히는 열매가 제법 탐스럽습니다. 열매는 마치 동백 꽃의 열매와 비슷한 크기이고, 평범한 밤톨 하나 크기만 한데, 이게 두서너 개씩 모여서 맺힙니다.
아직은 덜 익은 모습입니다. 싱그러운 초록의 이파리 사이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다가 바람 더 쌀쌀해지면 열매 껍질의 색깔은 더 짙어지면서 새들을 불러 모으겠지요. 열매는 나무마다 무성하게 맺히지만, 아직은 색깔이 짙게 드러나지 않아, 한눈에 찾아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열매들을 찾아보는 재미는 이즈음이 더 큽니다. 마치 숲속에서 보물찾기를 하는 듯하지요.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하면 나무의 열매들은 아직 잎사귀 사이사이에 숨어서 바쁘게 속을 채우는 일에만 바쁠 뿐입니다. 그러다 지나는 이가 그를 알아보고 눈인사를 건네면 열매들은 수줍은 듯 고개를 반짝 치켜들고 살짝 인사를 건네지만 이내 자기 일에 바쁘지요.
식물의 열매를 관찰할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맺기 전에 이 나무는 어떤 모양으로 꽃을 피웠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열매를 보고 꽃 모양을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밤나무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겁니다. 온통 가시투성이로 맺히는 밤송이를 보고 길쭉길쭉하게 피어났던 밤꽃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잖아요.
결실의 계절 가을, 우리도 나무들처럼 지난 한해의 살림살이에서 거둬야 할 것들을 잘 찾아내 좋은 결실 맺으려 발길 재우쳐야 할 때입니다.
글 고규홍 (http://www.solsup.com)
가을③ – 햇살을 다투지 않고 나누는 슬기로운 뻐꾹나리
햇살을 다투지 않고 나누는 슬기로운 뻐꾹나리
뻐꾹나리 꽃에서 떠나지 않는 검정꼬리박각시 ⓒ 고규홍
깊어진 수목원의 가을은 달콤합니다. 사뭇 표정이 바뀐 가을의 깊이만큼 깊어진 가을 나무의 향기 때문입니다. 이즈음 눈에 낮은 땅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풀 가운데 자줏빛 꽃을 피운 뻐꾹나리(Tricyrtis dilatata)가 있습니다.
우리 토종 식물인 뻐꾹나리는 다 자란 것이 50센티미터 정도 크기입니다. 늦여름부터 피어나는 뻐꾹나리는 꽃의 생김새가 독특합니다. 꽃잎은 분홍빛인데, 그 위에 검은자줏빛 반점이 총총히 박혀 있지요. 마치 표범 가죽의 무늬를 닮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뻐꾹나리의 꽃에 찾아온 검정꼬리박각시의 날갯짓이 한창 바쁩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뻐꾹나리 꽃에 찾아든 곤충은 검정꼬리박각시 뿐입니다. 수목원의 다른 곳에 피어있는 뻐꾹나리 꽃에도 유난히 검정꼬리박각시가 많이 찾아옵니다. 큰 덩치의 검정꼬리박각시 때문인지, 다른 곤충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검정꼬리박각시는 다른 곤충들을 내치고 뻐꾹나리와 깊은 사랑에 빠진 듯합니다. 바삐 이 꽃 저 꽃 들락거리지만, 뻐꾹나리를 떠나지는 않습니다.
뻐꾹나리 꽃송이의 화피는 여섯 개로 갈라지며 피어납니다. 꽃송이 안쪽에는 암술대가 꽃잎 위로 불쑥 솟아올랐지요. 암술대는 솟아오르면서 셋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끝 부분에서 둘로 또 나눠집니다. 그리고 암술대를 둘러싼 겉으로 여섯 개의 수술이 돋아납니다. 암술과 수술이 꽃송이 위로 훌쩍 튀어나와 은근히 도도해 보입니다.
규칙적으로 돋아난 뻐꾹나리의 잎들은 서로 햇살 다툼을 하지 않습니다 ⓒ 고규홍
하나의 꽃송이는 위에서 볼 때 4센티미터 정도로 벌어지며 피어납니다. 불규칙하게 돋아난 반점은 암술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언뜻 보아 강인한 인상을 갖췄습니다. 여러 개체가 한데 모여 피어나서, 뻐꾹나리 꽃이 피어난 부근은 보랏빛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합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초가집 앞 오솔길 뿐 아니라, 큰 연못의 큰별목련 옆 화단 등 여러 곳에서 뻐꾹나리를 볼 수 있습니다.
뻐꾹나리의 잎사귀가 돋아나는 모습도 재미있습니다. 제법 규칙적이지요. 이처럼 잎 나는 형태를 어긋나기라고 부릅니다. 잎 나는 방식에는 어긋나기 외에 마주나기, 돌려나기, 모여나기 등이 있지요. 어긋나기든, 마주나기든 잎 나는 방식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잎사귀들 사이에 햇살 다툼을 벌이지 않도록 적당히 양보한다는 것이지요.
마주나기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지요. 마주나기는 뻐꾹나리와 달리 나뭇가지에 잎이 돋아날 때 한 쌍의 잎이 서로 마주보며 같은 자리에서 돋아나는 방식이에요. 한 쌍의 잎이 마주보며 돋아나고, 다시 위쪽에 새 잎이 한 쌍씩 돋아나는 방식입니다. 이 경우 새 잎 한 쌍이 돋아날 때는 놀랄 만큼 정확하게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서 돋아납니다. 새로 나는 잎사귀가 먼저 나온 잎이 받아야 할 햇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거죠.
돌려나기나 어긋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면서 햇살을 나눠 쬐는 것입니다. 모든 식물에서 새로 나는 잎은 어찌 됐든 먼저 나와 한창 빛을 모아 양분을 만들어내는 잎사귀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잎 돋아나는 모양을 꼼꼼히 관찰하면 금세 알게 되는 식물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글 고규홍 (http://www.solsup.com
가을⑤ – 입추 지난 뒤, 불볕 무더위를 반기는 나무들의 가을맞이
입추 지난 뒤, 불볕 무더위를 반기는 나무들의 가을맞이
독특하게 삼각형 주머니 모양을 가진 모감주나무의 열매 ⓒ 고규홍
낮이나 밤이나 아직은 뜨거운 염천 무더위가 식지 않았지만, 달력으로는 입추 말복 다 지났습니다. 이제는 맑고 햇살 많은 날씨가 이어져야 결실의 계절을 풍요롭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열매 뿐 아니라, 이즈음의 날씨가 맑아야 가을 단풍도 고와집니다. 가을 숲은 단풍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만, 그와 함께 놓치지 말아야 할 식물의 아름다움은 열매에도 있습니다.
우선 모감주나무(Koelreuteria paniculata)의 열매가 눈에 들어옵니다. 7월경부터 가지 끝에 노란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모감주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모감주나무는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남해안에 자생지가 있는 명백한 우리 토종 식물입니다.
천리포수목원과 가까운 안면도에는 천연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된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습니다. 모감주나무 자생지 가운데에는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곳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전남 완도의 대문리와 포항 발산리, 서해안의 백령도와 내륙인 충북 월악산 중턱에서까지 자생하는 모감주나무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토종 나무라는 증거가 되겠지요.
중국에서는 모감주나무를 훌륭한 선비의 묘지 옆에 심었다고 전합니다. 품위 있는 나무인 때문이라고 하는데, 근거는 뚜렷하지 않아요. 서양으로 넘어가서도 모감주나무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나무입니다. 영어로는 ‘Golden Rain Tree’라고 부릅니다. ‘황금 비 나무’라는 꽤 근사한 이름을 얻은 겁니다.
황금 비 나무라는 건 7월에 피어나는 노란 꽃 때문입니다. 7월에 키 큰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 가운데에는 가장 화려한 꽃이 바로 모감주나무의 꽃이지요. 꽃은 보름 넘게 가지 끝에 달려 있다가 떨어지지요. 그러고 나면 독특한 생김새의 열매를 맺습니다. 길쭉한 꽈리 모양으로 맺히는 이 열매의 안쪽은 텅 비어있는 듯한데, 세 장의 껍데기 안쪽에 각각 한 알이거나 두 알의 동그란 씨앗이 맺힙니다. 이 씨앗이 다 익으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까만색이 되는데, 이걸 절집에서는 염주 알로 쓴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무가 흔하지 않아서 모감주나무 씨앗으로 만든 염주는 대개 큰스님들이 쓰신다지요.
높은 가지 위에 편안하게 자리잡고 앉은 개잎갈나무의 단아한 열매 ⓒ 고규홍
히말라야시다라고도 부르는 개잎갈나무(Cedrus deodara)의 열매는 사실 마음먹지 않고서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초록의 바늘잎을 그대로 간직한 채 가지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은 열매는 눈을 높이 들어서 바라보지 않고서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잎갈나무의 ‘개’는 ‘가(假)+ㅣ’로 이루어진 말로, 우리 나무 이름 가운데 앞에 이 ‘개’자가 들어간 나무가 적잖이 있습니다.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가짜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입니다. 개잎갈나무는 우리나라 금강산 이북 지방에서 자생하는 잎갈나무와 생김새는 영락없이 닮았지만, 가짜라는 겁니다. 개잎갈나무는 잎갈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가을 되어도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상록성 나무입니다. 그래서 가짜 잎갈나무라 한 거죠.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중남부 지역에서 심어 키우는 개잎갈나무는 천리포수목원에서도 늠름한 자태로 자랐습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가장 먼저 지은 한옥인 ‘해송집’ 뒤편 언덕 마루에 서있는 키 큰 나무가 바로 개잎갈나무입니다. 10미터는 넘게 자란 이 나무의 가지 위에도 가을을 준비하는 열매가 도톰하게 올라왔습니다. 히말라야시다의 열매는 영그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립니다. 즉 올 가을에 꽃이 피고나면 천천히 열매를 키워서, 이듬해 가을에 완전히 영그는 겁니다.
나무들이 잎의 빛깔을 바꾸면서 낙엽을 준비합니다. 숲의 빛깔도 덩달아 바뀔 겁니다. 이즈음 한해 노동으로 이뤄내는 식물들의 열매를 관찰하는 것은 결국 풍요로운 생명을 느끼는 일이 될 겁니다.
글 고규홍 (http://www.solsup.com)